5. 나와 남이 함께 좋은 길

제가 이 이론을 생각한 것은 꽤나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이론이 저를 움직이지는 못했습니다. 꽤 오랫동안 이 이론을 음미하는 기간이 필요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다음 저는 이 이론을 제 삶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요. 공자님의 위대한 제자들까지도 다 실천해내기 어려웠던 공부니까 말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이것이 올바른 순서요 길인 것은 분명했으므로 저는 이 이론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앞에 인용한 성공회 주교처럼 죽을 때가서야 이것을 깨닫는, 그래서 실천은 해보지 못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이론을 삶에 적용함에 있어서 가장 불리한 직업 중의 하나가 작가, 또는 예술가입니다(저는 이십여 년을 글쟁이로서 살아 왔습니다). 예술가와 더불어 정치가 또한 이 이론을 삶에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왜 이들에게 이 이론의 적용이 어려운가 하면, 이 이론이 나를 남들과 격리시키기 때문입니다. 남과 상대하기 전에 나부터 수양을 해야 하니 자연 남과의 교유가 적어집니다. 이 말은 나와 남을 잇는 끈이 끊어진다는 것, 또는 나와 사회의 소통이 단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이론을 어느 정도의 강도로 적용하느냐는 저마다의 사정에 따라 달라집니다만, 이 이론을 100% 적용할 경우 출가한 이후의 싯닷타(싯다르타)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는 무문관(無門關)에 들어간 수행자나 사막에 은둔한 수도자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비사회적인 삶은 예술가와 정치인에게 치명적입니다. 정치인이란 남의 평판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으로 남과의 소통을 해야만 하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예술가는 자신은 남의 평판을 벗어나 초연하게 예술에 전념한다고 말합니다만, 또 그런 정신을 가진 예술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군가가 그것을 감상해 준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한 작가로서 저 또한 남의 평판에 의지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제가 향기와 벌나비 이론을 적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을 ‘제품 개발부’만 가동하고 ‘홍보부’는 폐지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전업 작가로서 책을 쓰는 이상 책은 널리 읽힐수록 좋습니다(물론 널리 읽히지 않는다고 해도 그 나름의 의미는 있습니다). 책이 널리 읽히고 읽히지 않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바꿔 말해서 좋은 책이라고 해서 반드시 읽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중에서도 홍보는 책이 널리 읽히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제가 말하는 홍보란 지면을 통한 광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적 네트워크를 가동하는 것, 즉 내가 아는 어느 평론가가 나의 작품에 대해 호의적인 글을 쓰는 것이라든가, 내가 아는 어느 기자가 나의 작품이 나온 것을 신문이나 방송에 소개하는 따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부터도 그런 인적 네트워크가 빈약한 편이었지만 향기와 벌나비 이론을 삶에 적용한 이후 그나마 남아 있던 그 네트워크까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 저에게는 아는 평론가나 기자가 거의 없습니다. 저와 자주 만나 모임을 갖거나 개인적인 친분을 가진, 제 일이라면 그동안의 친분 때문에라도 ‘밀어주지’ 않을 수 없는 ‘홍보부’로서의 누군가가 없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저는 제 책이 널리 읽히지 않는 결과를 받아들어야만 하였습니다(그런데도 가끔 널리 읽히는 책이 나왔습니다). “비용 없는 소득은 없으니까.”라고 말하며 저는 저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나는 지금 정신적 가치를 얻기 위해 물질적 비용을 치르고 있는 거야.”

그때 제 마음이 즐거웠을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현자가 아니었습니다. 군자 또한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그때 제 마음이 언짢음을 느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저는 가야 할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면 지금의 언짢음이 적어지거나 사라지게 된다는 것, 언젠가는 마음에 촉촉한 기운이 돌고 마침내 타자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남에게 의지하던 마음은 차차 가라앉았고, 그러다보니 명상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주변의 산천초목이 모두 흰눈에 덮인 것 같은 잠잠하고 고요한 상태는 아니더라도 눈을 감으면 줄곧 떠오르던 남에 대한, 또는 남과 관련된 잡다한 생각들이 현저하게 줄었습니다.

천천히, 그리고 나지막하게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하릴없는 시간이 심심한 시간이 아니라 넉넉한 시간으로, 남이 찾아오지(연락해오지) 않는 것이 외로운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것으로 느껴지게 되었습니다(그렇긴해도 때로는 남이 그리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중 이제는 “하산(下山)을 해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입산(入山)한 적이 없으므로 하산이란 당치도 않습니다만, 향기와 벌나비 이론을 삶에 적용하는 것 또한 하나의 입산으로 볼 수 있는 점이 있다고 보고, 이제는 남들과 나의 적으나마의 내적 이익을 나누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연이 다가왔습니다. 작년에 불교 방송국 지하에서 모임을 연 것은 그 인연으로부터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 인연이 있기 일년 전, 저와 함께 모임을 이끌었던 차명수 선생이 위빠싸나 명상을 수행하기 위해 미얀마로 떠났습니다. 차 선생은 전에도 미얀마에서 수행한 적이 있고, 또한 위빠싸나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던 때 저와 함께 모임을 만들어 수행하신 적도 있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직장에 매인 몸으로서 수행에 전념할 수는 없었는데, 큰 결심을 하고 한 조직의 최고 책임자 자리를 과감하게 벗어던진 다음 미얀마로 떠난 것입니다.

6개월만에 돌아온 차 선생은 저에게 함께 위빠싸나를 이웃들과 나누자고 제안하였고, 저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맑은 마음 명상원’이라는 이름을 걸고 모임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임을 저희는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 향기와 벌나비 이론에 입각하여 운영하였던 것입니다.

회원으로부터 어떤 정보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참다운 조직은 향기와 벌나비 이론에 의해 저절로 형성되어야 한다는 이치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순수히 자발적으로, 지도자의 향기에 응하여 저절로 모여드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모임! 그야말로 “가는 자 잡지 않고, 오는 자 거부하지 않는다.”인 것입니다.

이 원리를 적용하게 되면 회원의 수는 지도자의 향기의 정도에 따라 결정됩니다. 지도자의 향기가 열 마리 벌을 모을 만하면 열 명의 회원이 모일 것이고, 백 마리 나비를 모을 만하면 백 명의 회원이 모일 것입니다. 향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또는 향기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떠나고, 향기를 맡는 인연이 있는 사람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양자가 모두 좋은 자리즉이타가 실현됩니다.

먼저 지도자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의 향기가 열 명을 받아들 정도밖에 안 되는데 백 명이 모인다면 그것이 과연 성공, 또는 좋은 일일까요?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은 제가 앞에서 말한 홍보부가 열 배로 가동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홍보부란 곧 회원들의 이름을 적고, 주소를 파악하고, 연락처를 알아낸 다음 그것을 기초로 하여 회원들을 끈으로 묶고 인연으로 얽어 두는 것일 테지요.

그 결과 열 명이 맡을 만한 향기를 가지고 백 명을 모은 것인데, 그렇게 되면 회원들로서는 자기가 맡아야 할 향기가 적어지거나 향기의 질이 떨어지는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조금의 향기와 많은 구속!” 대개의 종교 조직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그러면서도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거나 반성하고 있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불이익은 지도자에게도 있습니다. 열 명을 거둘 만한 향기를 갖고 있는 지도자가 열 명을 지도한다면 그에게 남을 지도하는 일이 벅차지 않을 것입니다. 바꿔 말해서 그는 남을 지도하는 일 때문에 자기의 수행을 방해받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열 명을 지도할 만한 지도자에게 백 명의 회원이 찾아올 경우 그는 상구보리를 젖혀둔 채 하화중생에만 몰두해야만 합니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내적인 고요의 시간, 참다운 즐거움의 시간이 줄어들거나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향상을 멈추고 맙니다. 아니, 퇴보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 하산하여 주지가 된 지 3년 만에 그토록 청정해보이던 스님이 평범한 스님으로 변해버리고 맙니다. 향기와 벌나비 원리에 비추어 볼 때 그 분은 자신의 향기에 비해 너무 큰 직책을 맡은 것입니다.

향기와 벌나비 이론을 적용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배우는 사람이 올 만큼만 오고 오지 않을 만큼은 안 오기 때문에 지도자는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을 적절한 비율로 맞출 수 있습니다. 그는 하화중생에 유념하기 때문에 소승(小乘)이 아닙니다. 대승(大乘)이라는 이름 아래 실제로는 신자에 대한 탐심을 노출하고 있는 가짜 대승에 떨어지지도 않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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