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연재 > 김정빈 시인의 감꽃마을
[해설]작고 고요한 세계의 아름다움
2008-08-23 (토) 00:00
어린아이의 무지와 노인의 지식은 똑같이 순수함을 나타낸다. 그것은 최초이자 마지막이다. 우리는 순결을 가지고 왔다가, 그것을 가지고 사라진다. 순결은 우리의 훌륭한 동반자이다. -환라몬 히메네스
아이의 ‘무지’한 시선에 붙잡힌 꽃핀 한 식물의 아름다움은 경이 그 자체이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것을 그냥 지나친다. 아이의 안타까움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탄식과 어른의 이해할 수 없음이라는 심리적 거리에 다름아니다. 이미 낙원에서 추방된 자와 지금 낙원에 있는 자는 이렇게 한 사물을 보는 데서도 거리가 생긴다. 이 시의 ‘안타까움’은 물질문명의 세속 가치의 체계에 길든 어른과 순수한 의식으로 사물을 인지하는 어린아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 그것이 결코 극복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낙담에서 생겨난 것이다. 어린아이가 새로 핀 원추리꽃 한 송이에서 우주를 본다면, 어른들은 그저 값나가지 않는 작고 볼품없는 식물의 하나를 볼 뿐이다. 그러니까 어린아이는 놀라고, 어른은 그냥 지나치는 것이다.
그의 『감꽃 마을』에 외딴 집, 혼자 노는 아이, 사람의 기척이 없는 마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이유 탓이다. 장난감도 없이 하루 종일 혼자 감꽃을 줍고 노는 아이의 모습을 그린 「감꽃 줍기」나, 아낌의 대상이 오직 꽃신 한 켤레뿐인 「산골집 아이」, 혼자 놀다가 나중에는 자기가 자기에게 말을 걸게 되는 「내가 나에게」와 같은 시들이 보여주는 것은 한결같이 외로운 모습들이다. 그것은 시인 자신의 쓸쓸했던 유년체험의 반영일 수도 있고, 고독감과 소외의 현재적 심정의 반사일 수도 있다. 산골 그 자체가 사람이 번성하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데, 거기에서도 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외딴집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김정빈의 『감꽃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다. 그 외롭고 고요한 살림살이의 환경이 가져다주는 선물은 맑고 아름다운 마음씨이다. 작고 고요한 세계의 아름다움을 발결할 줄 아는 본마음의 바탕이다.
사람살이의 번잡함으로부터 머릿속이 수세미 속처럼 복잡하고, 쫒기듯 바쁜 생활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꽃핀 살구꽃나무에 귀를 대어 물을 퍼올리는 두레박질 소리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그 소리는 살구꽃나무 안에 맑은 우물이 하나 있을 것이라고 꿈꿀 수 있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이다.
시인의 고요한 것에 대한 편애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시집 곳곳에 흩어져 있다. 「감꽃 마을」에서는 내리던 가랑비가 그치고, 초록의 풀잎 위로 미끄러져내리는 햇빛과, 키 큰 해바라기들이 고개 숙이고 먼 나라 생각에 잠겨 있는 정경을 통하여 고요의 실체를 사실감있게 보여준다. 매매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 감꽃 마을의 고요는 무섭기조차 하다. 그래서 ‘모두들 무얼 하는 것일까’하고 ‘궁금한 초록 바람 한 자락이 기웃거려보기’도 하는 것이 바로 그 「감꽃 마을」이다.
겨울밤 사락사락 눈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고요 때문이다. 차량 소음으로 넘치는 도시에서 아무리 큰 눈이 내려도 사락사락 눈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산골집 겨울밤」은 겨울밤의 산골집 정경을 우리 눈앞에 제시한다. 눈내리는 겨울밤 오락거리가 없는 산골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무릎맡 주변에 모여 듣는 옛날 얘기는 중요한 오락거리의 하나이다. 그러나, 밤이 깊으면 할머니의 옛얘기가 아무리 흥미로운 것일지라도 한낮 내내 뛰어노느라 지친 아이들의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잠을 막을 도리는 없다. 그 잠속에서 아이들은 키가 큰다. 아이들이 하나씩 잠에 떨어지고, 밤이 이슥해도 우리들의 할머니는 아이들의 떨어진 내복 따위를 어둔 눈으로 바늘귀를 꿰고 깁느라고 잠을 잊는 것이다.
지나치게 완벽해서 시를 읽는 즐거움을 조금밖에 허락하지 않는 「물방울의 말」과 같은 작품에서도 우리는 하나의 물방울이 움직이는 물리적 법칙성 속에서 삶의 예지를 맵시있게 건져내는 시인의 솜씨를 만나게 된다. 높은 곳을 향해서만 정신없이 뛰어가는 세태와 비교하여, 아래로 아래로만 내려가는 물방울들을 얘기하는 것은 직접적이지는 아니더라도 은근한 풍자의 비꼼의 정신이 개입되어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또한 먹고 먹히는 양육강식의 비정한 먹이사슬의 체계에 지배받는 원시림의 동물세계와도 같은 사람들 사이의 살벌한 생존경쟁에 대하여, 서로 앞서려고 다투지 않는 물의 생리를 얘기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세상에서 가장 드넓은 것은 저 낮은 곳에 있다는 것, 모든 흐름의 궁극은 저 영원한 품안에 드는 것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진술들은 인생의 철학을 보여주는 아포리즘이다. 한 철학자는 ‘아포리즘은 큰 우주를 반영하는 작은 우주’라고 말하고 있다. 이 아포리즘은, 힘과 재화가 존경받고, 사람 위에 군림하고, 거드름을 피우고, 연약함과 가난은 멸시받아 마땅한 긋으로 여겨지는 세게의 외면적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더 크고 넓고 소중한 가치의 세계는 또다른 저곳에 있을 수 있다는 교훈을 제시한다.
「동쪽으로만」에서는 그 끝이, ‘해뜨는/ 장밋빛 나라’라는 상투적 결말 때문에 전체적으로 팽팽하게 유지되던 시적 긴장이 이완된 느낌이 없지 않지만, 삶의 또다른 교훈을 말하고 있다. 무릇 생명의 태어남과 번성에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덥혀주고 밝혀주는 열과 빛의 근원에 나아간다는 범속한 결말이 아쉬운대로 수난과 시련의 삶이 가져다줄 패배와 비관에 꺾이지 않고 헤쳐나가는 것의 소중함을 보여준다. 이어 제시되는 ‘길은 없고/ 가시나무숲’이라는 시행은 상황의 순탄치 못함을 예시한다. 길이 없다는 것은 어떤 장애물로 인해 앞이 가로막혀 있다는 뜻이요, 또 그 앞이 가시나무숲이라니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사람은 가시나무숲의 서슬푸른 가시에 살갗이 찢겨 선홍의 핏방울이 맺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와같이 장애물과 수난의 상황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사람살이의 보편적 조건을 꿰뚫어 보여주는 것이며, 동시에 그런 극복의 과정을 통해 삶의 의미나 존엄성 같은 것이 발견되는 것이 아닐까. 인생의 앞길에 놓여 있는 수난의 상황을 혼자 용감하게 극복하고 나아가는 것의 가치를 강조하는 일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은 소년들에게 특히 유익한 지혜를 심어줄 것이다.
이 아름다운 『감꽃 마을』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고, 그 맑음과 외로움과 비밀스러움, 그리고 작고 아름다운 것들과 만나는 기쁨을 자기 것으로 할 미지의 독자에게 나는 질투를 느낀다. 왜냐하며 나는 이미 『감꽃 마을』에서 오래 전에 추방된 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들을 ‘느낌’으로 껴안지 못하고(껴안음은 그것을 호흡하고, 그것과 자신을 일체화하는 것이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석주(시인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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