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내금강의 표훈사 못 미쳐서 부도거리에 ‘백화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암자는 없어진지 오래고 지금은 빈터만 남아있으나 태자를 그리며 한 생을 비구니로 늙은 백화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남아 전해지고 있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망국의 원망을 안고 금강산에 들어온 지 퍽이나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태자는 어느 날 밤 정양사 쪽 산봉에서 이상한 광채가 비쳐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왠 불빛일까?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빛은 반드시 좋은 징조이니 찾아가보리라 마음먹고 그 빛을 쫓아 발걸음을 옮겼다.

칡뿌리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몇 번이나 다시 일어나 험한 준령을 오르내렸으나 끝내 그 불빛이 비치는 곳에 이르지 못하였다. 비석거리까지 와서 더는 걸을 수 없게 된 태자는 하는 수 없이 주저앉았다. 그때 건너편 숲속에서 반딧불 같은 한 점의 불꽃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었다.

이상한걸! 태자가 엉금엉금 기어서 그곳까지 가보니 조그마한 집 한 채가 한적하게 서 있었다. 들여다보니 비구니들이 한방 가득히 모여앉아 불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때 아닌 깊은 밤에 초라한 베옷을 입고 선 낯선 손님을 본 여승들은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그대는 뉘시기에 이 밤중에 예까지 왔소이까?” 그중 한 여승이 사연을 물었다.

“길 가던 손이 온데 더는 걸을 수가 없어 하룻밤 쉬어갈까 하여 이렇게 찾아왔소.” 태자는 맥없이 대답하였다.

그 여승은 “여기는 여승들만 있는 곳이니 남정네들은 쉴 수 없사옵니다.”라고 거절하였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여승이 달려 나오더니 “태자님!” 하고 엎드려 우는지라 태자가 눈여겨 얼굴을 살펴보니 잊을 수 없는 약혼녀 백화였다.

백화는 태자가 금강산에 몸을 숨겼다는 말을 듣고 뒤쫓아 금강산에 왔으나 이때까지 그를 찾아내지 못해 안타까이 나날을 보내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불현듯 그리운 사람을 만났으니 백화의 마음이 오죽 기뻤으랴. 그러나 다 해진 베옷에 거덜이 난 짚신을 신고 있는 태자의 초라한 모습에 백화는 몹시 놀랐다.

나라를 되찾으시겠다고 군사를 거느리고 왕국을 떠난 태자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이람?

태자를 쳐다보는 백화의 눈에는 어느덧 이슬이 맺혔다. 백화의 처량하면서도 애정에 넘친 보습을 지켜보며 한동안 말없이 서있던 태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이미 나라를 잃고 부모를 잃은 몸이니 아내가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내 홀로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고저 하니 그대는 나를 기다리지 말고 딴 곳에서 배필을 찾음이 마땅할까 생각하오.”

말소리는 낮았으나 비장하게 울려왔다. 백화는 미리 속셈을 해둔 듯 결연한 태도로 일어나서 말하였다.

“태자님도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게 위해 이곳에 오셨거늘 저더러 딴 데로 시집가라 함은 무슨 뜻이오이까? 옛글에도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였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내 비록 성례는 하지 않았어도 이미 태자님과 백년가약을 한 몸이온 데 어찌 딴 남자에게 시집을 가라 하시오이까.”

말문이 막힌 태자가 묵묵히 서있는데 백화는 안에 들어가더니 자기의 머리태를 베여 삼은 신을 들고 나왔다.

“소녀의 적은 성의오니 받아주옵소서. 소녀는 태자님께서 나라를 되찾을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겠사오니 부디 몸성히 다녀오시기를…”

백화의 간절한 소원이 담긴 이 작별의 인사말은 눈물 속에 얼버무려져 끝을 맺지 못하였다.

태자는 고맙다는 인사말도 없이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이것은 결국 그들 간의 마지막 상봉이었으며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시대발전의 추세에 역행한 탓으로 ‘마의태자’는 비로봉에서 무주고혼이 되고 백화는 이 암자에서 태자를 기다리다가 속절없이 한생을 마쳤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