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황상제가 산다는 백옥경에서 남쪽으로 멀리 바라보이는 남악의 산봉우리는 언제나 엷은 안개 속에 잠겨있었다. 이것은 속세의 인간들에게 남악에 있는 선녀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지 않게 하려는 위부인의 술책이었다.

남악의 영봉에서 3,000년이 지났건만 위부인은 아직 한번도 선녀들이 속세의 남자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였다. 우선 선녀들이 속세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들은 오직 엷은 안개 낀 남악의 영봉밖에는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남악에는 남자라고는 8만년을 살아 팔만옹이라 불리는 백발의 노인 하나만이 있어 선녀들은 역시 남자라고는 몰랐다.

만약 선녀들이 속세의 인간들과 접촉하려는 기미만 보이면 위부인은 그날로 옥황상제에게 고하여 무서운 형벌을 가하게 하였다.

그래서 선녀들은 남악에서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인간세계가 몹시도 그리웠고 보고 싶었으나 감히 내려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이른 아침부터 위부인 앞에 단정히 앉아서는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경전을 외우곤 하였다.

그러다가는 쉴참이면 날개옷을 입고 남악의 영봉을 훨훨 날아다니며 소일하곤 하였고 잠시라도 엷은 안개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위부인으로부터 엄한 꾸중을 듣곤 하였다.

“우리가 무슨 죄를 졌다고 영봉만을 맴돌아야 한다니?” 이것은 선녀들 중에서도 제일 활달한 성격을 지닌 채선이의 말이었다.

“채선이와 나란히 영봉을 맴돌던 옥선이가 속삭이듯 조용ㅇ히 말했다.

그것은 채선이가 몇해 전에도 이런 말을 했다가 한 달 동안이나 벌을 받고 옥에 갇혔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채선이는 무슨 말인가 더 하고 싶었으나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 내려가고 싶어 하던 채선이의 희망은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그것은 어느 날 금선이라는 선녀가 구슬을 잃어버린 데서부터 시작 되었다.

“부인님, 소녀가 그만 구술을 잃어버렸사와요.”

금선이는 눈물이 가랑가랑하여 이야기를 했다.

만약 이 구슬을 잃어버리면 선녀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가 없어지고 만다.

“구슬을 잃어버리다니, 어디서?”

위부인의 눈썹은 꼿꼿해졌다. 이쯤 되면 위부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른다.

“어디다 떨궜느냐?”

“남악봉을 돌다가 떨구었는데 속세에 떨어졌는가 합니다.”

위부인은 더욱더 놀라 몇 만 리밖까지 내려다본다는 요원경을 들어 멀리를 내려다보았다.

“저런, 금강산의 골안에 떨어졌구나.”

한동안 여기저기 살피다가 요원경에서 눈을 떼며 위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금강산이라구요?”

부인의 말을 듣는 선녀들은 모두 놀랐다.

“금강산의 골짜기를 흐르는 맑은 담소에 떨어졌구나. 물속에 떨어졌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 구슬이 사람들의 손에 들어갈 뻔 하였구나.”

“황송하나이다.”

금선이는 몸 둘 바를 몰라하며 머리를 숙이고 사죄했다.

“누가 가서 구슬을 가져오겠느냐?” 부인은 둘러앉은 선녀들을 보고 물었다.

“소녀가 가겠나이다.” 금선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금선이야 의례 가야지, 그러나 혼자서는 안 돼.” 하며 다시 위부인은 선녀들을 둘러보았다. 누구 같이 갈 사람이 없느냐는 눈길이었다.

“소녀가 함께 가겠나이다.”

한참 있다가 채선이가 입을 열었다.

“채선이가?”

위부인은 채선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채선이는 그만 얼굴이 따가와서 눈길을 떨구었다. 그는 위부인이 자기의 속마음을 빤히 꿰뚫어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위부인은 채선이의 이런 마음까지는 몰랐다.

“채선이가 가면 될것 같다. 같이 가거라.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속세의 사람들의 눈에 띄어서는 절대로 안 돼.”

위부인은 엄하게 당부했다.

“알겠나이다.”

채선이는 금선이와 나란히 서서 대답했다.

“그럼 곧 갔다오너라. 너무 늦지 않도록 해라.”

“네.”

채선이는 금선이의 손을 이끌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채선이와 금선이는 이날 한낮이 되어서야 금강산 봉우리근처에 이르렀다.

금선이는 무사히 구슬을 찾을 수 있겠는가 하는 근심이 앞섰건만 채선이는 수려한 산봉우리들이 안개 속에서 자태를 나타내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점 가슴이 설레기 시작하였다. 금강산의 아름답고 기묘한 산봉우리들이 채선이를 매혹시킨 것이다.

‘어쩌면 산봉우리들이 저렇게도 아름답단 말인가.’

채선이는 이 세상에서 남악의 봉우리가 제일 아름답다고 하는 위부인의 말만을 믿고 있었던 자기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비로소 느꼈다.

티끌 하나 없는 수려한 산봉우리들, 바위위에 바위가 올라섰는가 하면 그 위에 몇 백 년 자란 노송이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아찔하게 솟은 절벽, 그곳에는 비단필 마냥 폭포가 드리우고 있다. 바위너설에 부딪치고 부대끼며 흘러내리는 저 물은 어쩌면 그리도 맑단 말인가?

채선이는 구슬을 찾으려는 생각은 다 잊어버린 듯 발길이 사뿐히 땅에 닿자 목련화 한 가지를 꺾어들고 방긋 웃으며 금선이를 돌아보았다.

“채선아, 어서 구슬을 찾아야지.”

금선이의 이 말에 채선이는 정신이 든 듯 머리를 끄덕였다.

채선이는 금선이를 데리고 위부인이 가르쳐 준대로 어느 한 골의 큰 물 웅덩이로 내려갔다. 비탈진 바위돌에 흰 갈기를 일으키며 내려오던 물이 갑자기 커다란 못을 이루었다가 또 아래로 흘러내려가는 것이 마치 흰 비단으로 푸른 구슬을 꿰고 지나간 것 같다. 하얀 날개옷도 잠그면 초록색이 들것처럼 물은 푸르렀다.

채선이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물을 들여다보았다.

“아이, 구슬이 저기에 있네.”

금선이는 발을 구르며 물속을 들여다보며 기뻐했다.

“어디?”

채선이는 눈여겨 물밑을 들여다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구슬은 물속의 바위위에 있었다.

“정말 있구나.”

채선이도 환성을 올렸다. 그런데 저 물속으로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마치 수정알을 들여다보듯 물속은 맑고 맑았으나 그 깊이는 두 길이 실히 될 것 같았다. 물속으로 들어가자면 어차피 자맥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니 부득불 옷을 벗어야겠는데 이것은 선녀들의 법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금선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숨만 내 쉬었다. 채선이도 막연하여 무슨 생각이 나지 않았다. 두 선녀는 이렇게 말없이 금강산의 골 안에 맥없이 앉아있었다.

골 안은 산새소리마저 들리지 않아 한없이 조용했다.

(선경이나 다름없는 곳, 산새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이곳에서 누가 엿본단 말인가? 잠간 동안…. 무슨 큰일이 있으랴.)

채선이는 드디어 자기의 결심을 말했다.

“일없을까?”

금선이는 걱정스레 말했다.

“무슨 일이 있겠니. 이런 한적한 골 안에서.”

채선이는 염려할게 없다는 듯 옷을 활활 벗고서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잠간사이에 채선이는 구슬을 주어가지고 물속에서 나왔다. 그것은 정말 잠간 사이었다. 그러나 금선이는 그 시간이 무척 오랜 것 같았다. 그는 채선이의 손에서 구슬을 받아 쥐며 다른 한손으로 옷을 입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채선이도 별일 없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급히 손을 놀려 옷을 입었다. 누가 꼭 자기의 모습을 엿보는 것 같은 위구심을 느꼈던 것이다. 옷을 다 입고서야 채선이는 안도의 숨을 쉬며 방긋 웃었다.

“이제는 하늘로 올라가야지.”

금선이가 말했다.

“벌써?”

채선이는 이 아름다운 골 안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놀다 가자꾸나.”

채선이는 천태만상을 한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지체하는 것 같아서.”

역시 금선이의 걱정 어린 말이었다.

“일없어, 위부인의 승낙을 받지 않았니? 언제 다시 이곳에 와 본다니.”

채선이는 여전히 배포 있게 말했다. 그런데 이때 두 선녀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생겼다. 가까이에서 피리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어마나, 이게 웬 피리소리야?”

금선이는 깜짝 놀라 채선이의 가슴에 얼굴까지 묻었다. 그러나 깜짝 놀라기는 채선이가 더하였다. 그는 꼭 속세의 어떤 사내가 지금까지의 자기의 거동을 엿보고 있다가 놀려대기 위해 피리를 부는 것 같았던 것이다.

“이 일을 어쩌면 좋으니?”

채선이는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눈물까지 떨구며 금선이의 머리에 얼굴을 비벼대며 안타까와했다. 피리소리는 여전히 들려왔다. 어떤 때는 끝없이 깊은 심산 속으로 들어가듯 때로는 애끓는 심정을 하소하듯 피리소리는 바람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면서 선녀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선녀들은 피리소리에 매혹되어 점차 무서움도 부끄러움도 가셔지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자기들도 모르게 소리 나는 곳으로 한걸음 두걸음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섰던 곳에서 작은 등성이를 하나 넘으니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었는데 피리소리는 바로 그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한 사내가 아름드리 노송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피리를 부는 모습이 바라보이었다.

피리소리는 더욱 고결하고 우아한 곡조로 변하여 갔다.

(저렇게도 아름다운 피리를 부는 사람이 이런 속세에도 있었단 말인가?)

채선이는 이런 생각에 끌리어 그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채선아, 어디로…”

금선이가 채선이를 말렸으나 그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는 피리를 부는 남자의 얼굴이 뚜렷이 나타났다. 너무도 속세에서 고생을 하였기 때문일까?

얼굴은 거무스름하나 이팔청춘의 정력은 피리위로 오고가는 손끝이며 내리깐 눈과 곡조가 바뀔 때마다 내젓곤 하는 이마에도 차고 넘치었다.

낯선 사람의 인기척을 육감으로 느꼈던지 아니면 선녀의 진한 향내가 풍겼던지 한참 후 사내는 입에서 피리를 떼며 앞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는 놀라운 빛이 어리여 있었다.

“아가씨는 누구신지?”

사나이는 천천히 일어서며 채선이에게 물었다. 아마도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채선이의 자태가 사나이를 현혹시킨 듯하였다.

“흥취를 깨서 죄송하나이다. 너무도 피리소리가 아름다워 이렇게 외람되게…. 뉘신지 성함이나 알고 싶어서….”

채선이는 말끝을 채 맺지 못하였다.

“금강산 기슭에 사는 내 이름이야 그저 금동이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아가씨는 어디 계신지…”

“저는 남악봉에 사는 선녀올시다. 우연히 이 고장에 들렸다가 아름다운 피리소리를 들었나이다.”

채선이는 고맙다는 듯 머리를 다소곳이 숙였다.

“선녀 아가씨가 저의 피리소리를 듣고…”

“저의 소원입니다. 한번만 더 피리소리를 들려주시기 바라나이다.”

“선녀 아가씨의 소원이라면….”

금동은 천천히 피리를 입에 가져갔다. 그런데 이때 어디서인지 “쿵∼” 하는 둔중한 북소리가 울렸다. 하늘에서 위부인이 어서 올라오라는 독촉의 소리다.

“아- 그만…”

채선이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금선이가 다급히 찾는 소리가 들렸다.

“채선아, 채선아, 부인님이 부르신다.”

“죄송하오이다. 하늘로 올라갈 시간이 되었나이다. 훗날을 다시 기약하나이다.”

금동은 무슨 영문인지 말도 못하고 서있는데 갑자기 솔밭 속에 영롱한 무지개발이 드리우는가 싶더니 선녀의 목소리가 어리위에서 들려온다.

“안녕히…. 다시 만나기를 바라나이다.”

“선녀 아가씨…”

금동은 아득히 뻗어간 무지개발을 따라 하늘로 오르고 있는 두 선녀를 향해 소리쳤다.

이때로부터 며칠이 지나가고, 몇 달이 지나갔다.

채선이는 하늘로 올라왔으나 금동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그에 대한 생각은 날을 따라 더욱 사무치게 안겨왔다. 고요한 밤이면 인간세상에서 들려오는 애절한 피리소리가 울려왔다. 그것은 틀림없이 금동이 부는 피리였다. 채선이는 그 피리소리를 듣고 그가 지금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채선이는 마치 그에게 큰 죄를 진 것만 같았다. 채선이는 드디어 금동을 만나러 인간세상으로 내려갈 결심을 다지고야 말았다.

어느 날 위부인이 백옥경으로 가고 다른 선녀들도 놀러가고 없는 틈에 혼자서 그 알지 못하는 금강산기슭의 솔밭 속으로 내려왔다.

금동은 그날처럼 피리를 불다가 채선이를 맞아주었다.

이러기를 한번, 두 번, 세 번…. 이들 사이에는 이제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랑이 맺어졌다. 채선이는 하루라도 금동을 만나지 못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채선이는 혼자서 모대기며 괴로워하였다. 채선이는 괴로움을 먼저 눈치 챈 것은 역시 금선이였다.

“너 왜 그러니?”

금선이가 묻자 채선이는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이야기 했다.

“금선아, 나를 도와주렴. 이제 어떻게 하면 되니?”

채선이는 진정으로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금선이도 안타까웠다. 생각하면 모든 것이 자기의 구슬을 찾아주기 위해 채선이가 내려 간 것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선이에게는 무슨 꾀가 떠오르지 않았다. 금선이는 채선이와 가장 친근한 옥선이에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다. 옥선이도 이야기를 듣고서 처음에는 놀라다가 점차 그를 동정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채선이는 속이 타 죽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자꾸나.”

옥선이가 금선이에게 말하였다. 그들은 어느 날 남악봉에 있는 단 한명의 남자인 팔만옹을 찾아갔다. 인자한 이 할아버지에게 무슨 묘안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우리 채선이를 살려주세요.”

금선이와 옥선이는 채선이의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간청했다. 팔만옹은 하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무엇을 생각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은 딱하게 되었구나. 이런 일은 내가 남악봉에서 살아온 8만년동안 한번도 없었어.”

“그러니 어쩌면 좋습니까? 채선이가 죽어야 합니까?”

옥선이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하여튼 두고 생각해보자.”

이로부터 다시 며칠이 지난 뒤였다.

위부인은 수부에서 남해 용왕이 초청하는 생일잔치에 참가하기위해 먼 길을 떠나갔다.

“아마 오늘 하루는 내가 남악봉에 없을가 보오. 그러니 노인장이 선녀들을 잘 돌봐주오.”

위부인은 떠나기에 앞서 팔만옹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알겠나이다.”

노인은 대답했다. 위부인이 없을때면 팔만옹이 선녀들을 주관하곤 하였다. 팔만옹은 위부인이 떠나자 채선이와 옥선이, 금선이를 불렀다.

“오늘이 가장 좋은 때로다. 부인이 없는 틈에 우리 모두 내려가서 채선이와 금동의 혼례식을 하자꾸나.”

팔만옹이 결연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잘못했다간 모두가 엄벌을 면치 못할 판이다.

“할아버지, 고마워요.”

채선이는 팔만옹의 발끝에 머리가 닿도록 절을 하였다.

잠시 후 채선이의 혼례식을 찬동하는 여러 명의 선녀들이 팔만옹을 앞세우고 금동이가 채선이를 그리며 애절하게 피리를 불고 있는 솔밭으로 내려왔다.

이렇게 해서 솔밭 속에서는 참으로 희한한 혼례식이 벌어졌다.

혼례식때 웃으면 안 된다고 선녀들이 자주 놀려댔으나 채선이는 기쁜 웃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금동의 얼굴에도 행복의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옥선이는 팔만옹과 금동이 앞에 신선들이 자주 놀려댔으나 채선이는 기쁜 웃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금동의 얼굴에도 행복의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옥선이는 팔만옹과 금동이 앞에 신선들이 마신다는 류하주를 가득히 부어 권했고 금선이는 선녀들에게 천일주를 한잔씩 권했다. 모두 술을 마시고는 즐겁게 노래하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순간만은 그 누구도 위부인의 엄한 눈초리에 대하여서도 남악봉에 대하여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가 오직 청춘의 참된 보람만을 느끼고 있었다.

“8년 만에 처음 느끼는 즐거움이로다.”

팔만옹은 벌써 여러 차례 이런 말을 하였다. 흥겨운 춤판과 노래, 사람들을 황홀경에로 이끌어가는 금동의 피리소리…. 선녀들은 어느덧 위부인이 수부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날이 저물 무렵 ‘쿵∼’ 하고 둔중한 북소리가 울렸다.

북소리에 팔만옹을 비롯한 선녀들은 모두 정신이 들었다. 북소리가 울렸다는 것은 위부인이 돌아왔다는 것을 말한다. 북은 오직 위부인만이 치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 어쩌면 좋아요?”

채선이가 먼저 팔만옹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뒤따라 금선이, 옥선이가 팔만옹의 곁으로 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다. 모두 하늘에 올라가면 엄벌을 받아야 한다.”

팔만옹은 탄식하듯 말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합니까?”

채선의 얼굴은 눈물로 함뿍 젖었다.

“이제는 별도리가 없다. 오직 두 길만이 있다. 하나는 천상에 올라가서 죽음을 당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영원히 이 금강산에 남아있는 것이다.”

팔만옹은 선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무엇 때문에 죽음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금동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이곳에서 영원토록 살아가면 얼마나 좋아.’

이것은 모든 선녀들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할아버지, 이곳에 영원히 남아있을 수 없습니까? 그 길을 알려주세요. 우리는 여기에 남겠어요.”

채선이가 모든 선녀들의 의견을 대변하듯 말했다.

“그러자면 뭉쳐야 해. 선녀들 여러 명이 뭉치면 위부인이 하늘로 끌어올려가지는 못해. 위부인은 오직 선녀 한명씩만 끌어갈 힘이 있어.” 팔만옹이 말했다.

“그렇게 하자. 우린 모두 하나로 뭉치자.”

채선이가 말하자 선녀들은 앞을 다투어 모두 그의 둘레에 모여 들었다.

보통 때는 그렇게도 연약하던 선녀들이 어쩌면 이렇게도 굳세어 보인단 말인가.

“너희들이 장하구나. 나도 여기에 함께 남자.”

팔만옹이 선녀들 한가운데 들어서자 금동이도 그들을 따랐다.

‘쿵∼’

다시 둔중한 북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선녀들은 옴짝하지 않았다. 그러자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며 선녀들을 말아 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한데 뭉친 선녀들은 옴짝도 안했다. 태풍이 불자 우레가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팔만옹의 둘레에 모여선 선녀들은 옴짝도 안했다.

비가 억수로 내려 퍼붓기 시작했다. 선녀들은 점점 맥이 진했다.

“손을 놓으면 안 된다. 쓰러지면 안 된다.”

팔만옹은 소리쳤다. 노인의 이 목소리에 선녀들은 다시 기운을 내었다.

선녀들은 이겼다. 위부인은 태풍으로도 폭우로도 선녀들을 굴복시키지 못한 것이다.

금강산에서 살자고 위부인의 위협도 항거의 힘으로 이겨내었으나 막상 살자고 하니 그들은 떳떳치 못한 생각이 들었다.

구만리장천에 널려있는 이름 모를 별나라에서도 신선들이 풍악을 잡히며 이 아름다운 산속에 내려와 얼마나 즐거이 하루 종일 놀다 가는가! 그것을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였다. 차라리 숨어서 살자. 그러면 어디로 갈까?

그들이 이 골, 저 골의 크고 작은 폭포들과 푸른 담소를 지나 어느 남쪽의 등마루에 오르니 사면에 연봉들이 들러있고 그 복판에 키가 서너 길 가량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다. 이윽고 바위근처까지 가보니 그곳은 한결 아늑한데 거기서도 얼마든지 변화무쌍한 금강의 아름다움을 사시절 즐길 수 있었다.

여기가 금강산의 한쪽 변두리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살던 하늘나라보다야 얼마나 더 아름다운 곳인가. 무섭던 위부인의 힘도 미칠 수 없는 이곳에서 천만년 숨어살자 하고 그네들은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이름 없던 그곳을 신선이 숨어사는 곳이라하여《은선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