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ㆍ기고 > 법타 스님이 들려주는 금강산 전설

범어사 노장은 금강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br>그리하여 그는 그곳에서 바위가 되었다

| | 2010-02-12 (금) 14:49

외금강 온정리의 남서방향 관음연봉의 하관음봉에 있는 노장암(老長岩)은 누구의 눈에나 잘 뜨이는 기암으로서 늙은 스님이 바랑을 진채로 앉아 앞을 내다보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노장이란 불교에서 이른바 덕행이 높은 연로한 스님을 존대하여 이르는 말이다.

옛날 경상도 동래고을 범어사에 이름을 고상준이라 불리는 칠십고령의 노장이 있었다. 50년 너머 중노릇을 한 그는 한평생을 같은 절에서만 살다보니 들은 바는 있으되 본 것이 없는지라 스스로 자신을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하였다. 또 자기도 남들과 같이 조선팔도 다는 몰라도 명승지로 이름난 금강산만이라도 돌아보았으면 생각하고 있었다.

노장의 제자인 범어사의 주지 박상범이 그의 이런 심정을 헤아리고 젊은 스님 한명을 달려 길을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 주지는 고상준 노장이 길을 떠나는 날 멀리까지 따라 나와 바래주며 말했다.

“노장님, 오래지 않아 단풍계절이 되오니 여기저기 들리지 마시고 직방 강원도로 들어가시여 금강산을 보소이다.”

“음, 그렇게 해보겠네.”

이렇게 되어 노장은 가을에나 돌아올 작정을 하고 범어사 스님들의 배웅 속에 길을 떠났다. 때는 춘삼월 꽃피는 계절이었다. 그는 먼저 경상도, 강원도의 명승고적들을 돌아보고 금강산에 도착하자 유점사에 들렸다.

유점사주지는 노장이 노독을 풀도록 며칠간 푹 쉬게 한 다음 팔팔한 젊은 스님을 안내자로 붙여주며 온정리에서부터 구경을 시작하되 그에 앞서 삼일포 몽천암을 찾아가 한 이틀 더 다리쉼을 하도록 일러주었다.

젊은 스님을 앞세운 노장이 삼일포 몽천암에 이르니 해는 금방 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눈부신 해살을 받아 안은 산봉우리가 그 무슨 신비로운 광채에 싸인 보물산 같았다. 이윽고 쟁반같은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라 오더니 은은한 달빛 속에 펼쳐진 산천풍경은 참으로 형용키 어려웠다. 달빛은 뭇봉우리들을 어루만지며 계곡을 따라 흘러들고 그 속에 밤안개는 산허리에 감돌아 산은 허공에 둥실 뜬 배가 되어 물결 따라 흔들리는 듯하였다.

“아, 금강산은 참으로 천하절승이로다. 밤에도 이같이 아름다우니 낮에야 더 말해 무엇하랴!” 노장은 저도 모르게 혼자소리로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그날 밤 노장은 몽천암에서 쉬고 날이 밝자 그 절 스님들의 안내를 받으며 삼일포를 구경하였다. 그 둘레가 15리 잘되는 삼일포를 돌아보면서도 호수가의 풍경이 어찌나 마음을 사로잡았던지 그는 조금도 힘든줄을 몰랐다.

삼일포에서 하루를 더 묵고 몽천암을 떠난 노장일행은 운곡리를 지나 온정천을 끼고 온정리에 들어섰다. 연해 감탄하며 걸어가던 노장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허, 이 명산엔 모든게 다 골고루 갖추어져 있네그려. 아무렴 크지 않은 살림집에도 나들문이 있는데 이렇게 큰 명산에 출입문이 없을라고?!” 두 젊은 스님들도 듣고 보니 그럴듯하여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노장은 오른쪽에 우뚝한 매바위봉과 왼쪽에 솟아있는 망수봉을 보고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들이 온정리에 들어서자마자 노장은 금강온천에 들려 뜨거운 온탕에서 시원히 몸을 씻고 금시 하늘에 날아오를 것만 같은 마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숙소로 향했다. 날이 저물어 숙소에 든 그는 노곤한 다리를 쭉 펴고 하루밤 편히 쉬였다. 새벽에 단잠에서 깨여 툭툭 털고 일어나니 그간에 쌓였던 피로가 씻은 듯이 가시어지며 몸이 한결 거뜬해졌다. 그래 노장은 아침밥 한 그릇을 달게 먹고 시중하는 두 젊은 스님들과 함께 기분좋게 신계사를 찾아 길을 떠났다. 가벼운 걸음으로 훨훨 걸어 깊은 수림속 오솔길에 들어선 그들은 송이버섯과 머루, 다래를 따러 다니는 아이들과 마주쳤다.

아이들의 바구니 안에는 벌써 머루, 다래가 조금씩 들어있고 송이버섯도 몇 개 보였다. “엉? 벌써 계절이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그러니 이젠 돌아갈 때가 거의 되었군 그래.....”

노장은 젊은 스님들을 돌아보며 나직이 말하고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노장님은 여러 곳의 명승지들과 금강산의 선경에 정신을 빼앗기시여 세월이 가는 것도 모르고 계셨습니다.” 범어사에서 같이 온 젊은 스님이 이렇게 말하며 웃으니 “하긴 그렇게 되었군.” 하고 노장은 고개를 끄덕이었다. 녹음이 한창 우거지던 여름에 범어사를 떠나 금강산에 들어선 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가을이라니 참으로 놀라왔다.

두 젊은 스님을 재촉하여 고개마루에 올라선 노장은 “아, 세상에 이런 곳도 있었던가!” 하며 깊은 감동 속에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 밑에 있는 신계사에서 풍경소리가 노장의 귀가에 꿈결인 양 은은하게 들려왔던 것이다. 속세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별천지인 듯 혹시 극락세계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노장은 “내가 50년 세월 불경을 외우면서 오매불망 그렇게도 그려오던 극락세상이 바로 여기로구나!” 하고 혼자말로 심중의 격정을 터치였다. 확 트인 넓은 골을 한 가운데 두고 빙 둘러선 웅대하고 절묘하며 혹 기피하기도 한 집선봉파 채하봉, 그에 잇닿은 장군봉, 멀리 떨어져 있는 비로봉의 아아한 모습, 옥녀봉의 아름다운 풍경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또한 그 앞에 틀지게 들어앉은 세존봉은 염라국의 철위산처럼 위엄 있고 기걸스러웠다. 하지만 이 금강산에는 극락세계만 있고 지옥 같은 것은 있을 법도 하지 않았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이 같은 절경에서 슬픔을 모르고 한평생을 즐겁게 산다면 얼마나 좋으랴. 오로지 선행만을 하여야 가게 된다는 불가의 극락이 과연 여기 금강산의 지상극락만큼 좋기나 하겠는지…)

금강산의 절승한 경치에 한껏 취한 고상준 노장은 실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 어느덧 점심때가 되어 젊은 스님들은 이젠 그만 구경하고 신계사에 내려가 점심요기를 하자고 그의 손목을 이끌었다. 그런데 노장은 오히려 그들의 등을 떠밀어주면서 자기는 배고픈 줄도 힘든 줄도 모르겠으니 걱정 말고 그대들이나 어서 내려가라고 하였다. 젊은 스님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큰 절에 들려 점심을 준비해 놓겠으니 인차 내려 오시오다.”

“알겠네, 어서 먼저 내려들 가라구.”

“노장님, 곧 내려오셔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신신당부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고개마루에 노장 혼자만이 남게 되자 그는 좀 더 높은 곳에 올라가 부근의 풍경을 보려고 서쪽 능선을 타고 올랐다. 이 산발은 연 30리의 관음연봉 맨 아래에 위치한 하관음봉의 끝부분이었다. 그는 적당한 자리를 골라 편안히 앉았다.

때는 마침 천고마비(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의 가을철이라 하늘은 더욱 놓아지고 더없이 푸르렀으며 단풍으로 단장한 봉우리들은 맑은 하늘에 불을 달려는 듯 붉게 타올랐다.

천하장관인 풍악의 경치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수려하고 훌륭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은 구름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았으며 세존봉은 기세차면서도 섬세하고 웅장하면서도 기묘하였다. 그것을 불가의 조종을 상징하여 이름 지었을진대 석가모니가 정년 여기에 와본 적이 있기나 한가하는 생각이 피뜩 노장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극락이 좋다 해도 이곳보다 더 좋으랴, 하필 죽어서만 간다는 세상을 무엇 때문에 찾으랴.

노장은 이 천하명산 금강산을 떠나서는 아무데로도 가고 싶지 않았다.

무아경에 빠져든 노장은 어느새 해가 비로봉 뒤로 넘어가 자취를 감춘 것도 알지 못했다. 밝은 빛이 사라지면서 불그레한 것이 하늘에 어리는 것을 보고서야 그는 비로소 해가 진 것을 깨달았다. 한데 이게 대체 웬일이냐. 해가 지면 어둡기 마련이거늘 어찌하여 세상은 다시 환해지는가.

남쪽 불교계의 지원으로 복원된 신계사. 관음연봉 노장암 아래 위치하고 있다. 크게보기

노장은 놀란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살펴보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오색영롱한 구름장들이 하늘가에 쫙 펴져있고 채하봉에 두둥실 떠 있던 흰 구름에는 방금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바로 불타는 그 구름들이 온 골 안을 붉게 비쳐주고 있는 것이었다. “옳거니, 저 봉우리에 붉은 노을이 비껴 빛을 발한다고 하여 ‘채하봉’이라 하였구나!” 노장은 혼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었다.

이때 아래쪽에서 “노장님! 고상준로장님!” 하고 부르는 젊은 스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장은 몸을 반쯤 일으켜 아래를 한번 굽어보고 다시 본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지금 그의 귀에는 안타까이 찾는 젊은 스님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는 붉은 빛이 점점 사라져가는 채하봉을 끝없이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있었다.

범어사에서부터 노장을 따르며 시중들던 스님이 산발을 더듬어 하관음봉으로 올라왔다. 그 스님은 바랑을 진채 편안하게 앉아있는 노장을 보자 걱정하던 마음이 놓여 기뻤으나 그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노장님, 노장님∼” 하고 나직한 소리로 불렀다.

노장은 못 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노장의 바로 앞에 이른 중은 “고상준 노장님!” 하고 조금 큰소리로 부르다 말고 펄쩍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고상준 노장이 금강산의 기암들처럼 돌이 되어 굳어져 있었다.

결국 노장은 금강산이 극락이라고 생각하여 하관음봉 중턱에 영원히 남아있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외금강의 하관음봉에는 ‘노장암’이라는 기묘한 바위하나가 더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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