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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원측(圓測)스님은 도강(盜講)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 | 2008-06-30 (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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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보기얼마 전에 우연히 한 지인(知人)의 집에서 고영섭 교수의 저서 『문아대사』(불교춘추사, 1999)를 잠깐 보게 되었습니다. 앞 부분만 조금 본 셈인데요. 주로 원측스님의 전기에 대한 검토를 하는 장이었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저는 비로소 원측(圓測, 613〜696)스님의 전기에 대해서 제대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원측스님은 그 불교사적 의미만큼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분은 아닌 것같습니다. 그 분의 『해심밀경소』를 잠깐 읽어보았을 때, 『대지도론』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만큼 백과사전적 지식을 풀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해심밀경소』가 티벳어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만큼 충분히 연구할 필요가 있지요. 하지만, 저는 유식에는 어둡고 해서 별로 스님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학부시절부터 늘 들었던 이야기가 원측스님의 도강(盜講)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현장(玄奘)스님께서 자은규기(慈恩窺基) 한 사람을 앉혀놓고서 강의를 할 때, 원측스님께서 도강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 끝에는 으레 우리 학자들의 강한 부정이 이어집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것은 자은규기 계통에서 날조한 소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런 이야기를 저도 수없이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문아대사』를 통하여 비로소 그러한 이야기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찬녕(贊寧)이 지은 『송고승전』의 원측전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 원전을 읽은 결과, 저에게는 종래 우리 선학들이나 동학들(고영섭 교수를 포함하여)이 원측전을 해독하는 방식 이외의 해독 역시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제가 읽는 것처럼 읽을 때 비로소 원측스님의 또 다른 면모(새로운 원측像)이 우리 앞에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몇 날 몇 일을 되씹어 보면서, 저의 독해(讀解)를 여기서 한번 여러분들에게 고백하고, 여러분들의 고견을 여쭈어 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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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송고승전』의 원측전을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한문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대개 의미가 통하리라 봅니다.

당나라 서울 서명사 원측전(薄塵, 靈辯도 함께)

석원측. 성씨와 가문은 잘 알 수 없으나, 어려서부터 명민하였으며 지혜가 종횡무진이었다. 삼장법사 현장이 자은규기 스님을 위하여 새롭게 번역한 『유식론』을 강의하였을 때, 원측은 문을 지키는 자에게 뇌물을 주고서 몰래 숨어서 들었다. (강의를 다 듣고 절로) 돌아와서는 강의의 내용을 문장으로 엮어두었으며, 강의가 다 끝나자 원측은 서명사(西明寺)에서 종을 쳐서 대중을 소집하고서는 『유식론』을 강의하였다. 규기는 그(원측 --- 김호성)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마침내는 원측이 강의하도록 양보하게 되었다(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장이 『유가론』을 강의하자 다시 전과 마찬가지로 몰래 들어서 그 가르침을 받았으나 규기에 뒤지지 않았다. 고종 말과 측천무후의 초기에 의해(義解)를 뽑을 때에 응하여 역경관(譯經館)에 들어가니, 대중들이 모두 미루었으며(이 일은 원측스님이 적임이라고 하면서 대중들이 사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됨. ---- 김호성), 『대승현식론(大乘顯識論)』 등의 경전을 번역할 때에는 원측이 증의를 담당하였는데, 박진, 영변, 가상(嘉尙) 과 함께 하였으며, (천자가 보내주는) 가마를 타고 다녔다. 지은 책으로는 『유식소초(唯識疏鈔)』가 있는데 자세히 경전과 논서를 해석하였으니, 천하의 절반에 유통되었다.(대정신수대장경 50책, 727b)

한문 원문이 어렵습니다. 박진, 영변, 가상은 모두 원측과 함께 증의를 담당한 스님들로 보아야 문맥이 매끄럽게 됩니다. (이 점은 유식을 전공한 김성철 박사님의 조언에 따랐습니다. 원측전의 부제에서 박진과 영변만을 언급한 것은 가상에게는 따로이 전기를 세웠기 때문인 것같습니다. 『송고승전』에 가상전이 있다는 것 역시 김성철 박사의 정보제공입니다.) 고교수의번역과 대조해 보면,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규기가 강의를 양보할 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다”고 본 주체/주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원측으로 보고, 고교수는 규기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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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께서는 이 원측전을 읽으시고 어떻게 해석/해독하시겠습니까? 우선, 종래 선행연구들에서 우리 선배학자들이나 동학들이 어떻게 해석하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같은데요. 제가 현재 여기서 입수할 수 있는 관점은 둘입니다.

첫째, 오형근 교수님의 관점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법사가 신라인이고, 또 재능면에서도 중국계의 승려들보다 월등하였으므로 이에 시기 질투하여 심지어 모략까지 받았다. 한 예를 들면, 현장법사가 귀국하여 중국계 제자인 규기대사 등에게 유식을 강의하였다고 한다. 법사는 신유식과 더불어 새로운 인도불교를 학습하고 싶었으나 외부 인사는 입문시키지 않으므로 수위에게 뇌물을 주고 도청하여 다시 숙소인 서명사에 돌아와 대중을 집합하여 유식을 강의하였고, 주소를 저술하여 발표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이는 일종의 모략적인 기록이며 오히려 그가 학문적로 앞서 있고, 또 재능이 뛰어났음을 암시하고 있다.(오형근, 『유식사상연구』, 81쪽.)

또 이들 문헌이 오히려 규기법사의 소심성과 원측법사의 위대성을 대조하여 주고 있는 문헌이라 하겠다(82쪽)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둘째, 고익진 교수님의 관점을 들어보지요.

크게보기규기(632-682)는 현장이 전래한 호법(Dharmapaala 530-561) 계통의 새로운 유식사상에 입각해서 법상종을 세운 사람이며, 원측과는 여러모로 학해(學解)에 대립되는 바가 있다. 그렇다면 『송고승전』의 모욕적인 기술은 그 파에서 원측을 비방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고익진, 『한국고대불교사상사』 , 1989, 139-140쪽)

대개 이렇습니다. 고영섭 교수의 『문아대사』에서도 아주 강렬한 비판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심지어 『송고승전』의 찬자 찬녕에 대해서까지 비판적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그 책을 갖고 있지 못하여 직접 인용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위의 『송고승전』의 기사가 좀 달리 읽혔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확인해 두어야 할 것은, 저 이전의 모든 선배학자들이 모두 원측스님의 위대성에 조금이라도 훼손을 하지 않으려는 호교론적 관점을 갖고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 동기나 이유에 대해서, 즉 원측스님은 위대한 분이다.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저 역시 동감합니다. 저 역시 『해심밀경소』를 읽어본 일이 있으므로,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분명히 해놓고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야기인가?

원측스님을 더욱 더 높이 존중할 수 있는 해석방법이 있는데, 아무도 그런 점을 보지 못하고 간과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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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측스님의 도청설을 제작한 것이 만약 규기스님 측이라고 한다면, 그들의 의도는 원측스님을 부도덕한 사람으로 만들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또 결국 원측스님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변호논리가 그런 매수도청은 하지 않았다라는 것 밖에 없다는 점 역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변호논리만 가지고는 언제나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오히려 그들이 만들어준 이야기/전승 안에서도 원측스님의 또 다른 면목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럴 때 더욱 더 빛나는 이야기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까지 우리가 현장스님의 권위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없지만,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사실 현장 스님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도에 가셔서 경론이나 사상, 즉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온 것은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불법이라는 것이, 그것을 얻는 과정에 있어서 아무리 한 개인이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고 해서 그의 사적 소유물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지요. 당연히 지극히 공하여 어떤 사적인 것도 개재될 수 없지요.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든 현장스님이 새롭게 가지고 와서 번역한 『유식론』이나 『유가론』을 오직 규기스님 한 분만을 위해서 강의하는 것 자체가 부조리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아무도 현장스님이 규기스님 한 사람에게만 몰래 가르침을 베푼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 당시에 반대하거나 제지하거나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문지기마저 세우고 있는 것이지요. 그 때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신 분이 바로 원측스님입니다. 원측스님이라고 해서 뇌물을 준다든가 도청을 한다든가 하는 일이 갖는 부도덕성에 신경 쓰이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개인적인 모순을 감내하고서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불법의 공적 성격을 유지하는 일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그분이 현장스님의 강의를 도청하고 와서 한 일을 보면 이것은 명백해 집니다.

종래 수세적인 변명을 일삼았던 이유는 이 부분에서 원측스님의 매수 도강 이후의 행적을 공적인 차원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겨우 규기보다 먼저 책을 쓰고 강의를 하였다는 선후관계에서만 파악하였기 때문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원측스님은 현장스님의 강의가 끝나면 자신의 절로 돌아와서는, 그가 오늘 들은 강의의 내용을 기록으로 정리하여 문장을 쓴 것입니다. 고교수는 그렇게 봅니다만, 정확히 어떤 하나의 책을 지었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그날 그날의 강의의 내용을 잊지 않기 위하여 기록한 것, 즉 강의록 내지는 비망록의 성격이 강하리라 봅니다.

하여튼 그러한 행위가 그 자신의 이름을 먼저 드날리려는 차원이었다면, 그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비난받아서 마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차원이 아니었음은 바로 다음 귀절이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현장의 강의가 다 끝나자, 바로 종을 쳐서 대중을 불러모아서 『유식론』을 강의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현장 --- 규기의 의도를 만천하에 드러내면서 무너뜨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 현장이 새롭게 전해온 인도의 신유식(新唯識)의 지식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외국에서 수입해온 자료 하나 감추어 놓고 그것으로 행세하려고 하였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규기는 원측이 먼저 강의를 하여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것을 그 자신이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양보하였다는 것입니다. 양보가 아니라, 사실은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고교수처럼 번역한다면 규기는 다른 사람들의 여론에 매우 소심하게 반응한 것이 됩니다. 그것이 두려워서 라고 한다면, 애시당초 현장으로부터 독강(獨講)을 받으려 했겠습니까. 그것이 아니지요. 그런 의도가 있었지만, 원측이 먼저 종을 쳐서 대중을 소집하고서는 『유식론』을 강의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규기는 원측이 먼저 강의를 통하여 인심을 얻는 것을 싫어하였지만 마침내 강의를 먼저 하도록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여기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애시당초 이 이야기를 규기스님 측에서 만만들어냈다고 한다면, 원측의 매수도강이라는 행위의 부도덕성만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내 그 보다도 먼저 ‘현장 --- 규기’측의 부도덕성이 더욱 크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매수도강이라는 원측의 부도덕성은 지배구조의 부도덕성에 대한, 당시 불교계 전체 내지 불자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하나의 저항권(抵抗權) 행사였던 것으로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저는 봅니다.

한편, 종래에 도청설을 부정하는 논거의 하나로서 원측스님은 현장스님에게 새로운 지식을 듣지 않더라도 이미 나중에 역장에서 증의를 할 만큼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내세웁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그러한 논거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원측스님의 지식수준이 이미 중국에 전해진 불법의 정수와 오의를 다 맛본 뒤라는 것은 저도 인정이 됩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장이 가져오는 새로운 지식정보에 대해서 문을 닫고 탐구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중국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정보를 다 얻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정도로 최신과 첨단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선진외국의 지식정보를 갈구하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 흥교사에 위치한 신라 고승 원측의 사리탑. 크게보기오히려 더 겸허하게 현장스님의 가르침이나 전하는 정보를 갈구하고 있었던 것으로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현장스님은 자신의 제자인 규기스님만을 앉혀놓고 강의를 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고 합시다. 원측스님은 어떻게 해야 할 까요? 실망(失望)하였으며, 발분(發憤)하였을 것입니다. 중국 불교계 전체의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 일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문지기를 매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하여 투도계(偸盜戒)는 범한다 할지라도 불법의 공적 성질은 지켜내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가 그 강의를 듣고서 사적인 명예를 드날리는 데 썼다면 허물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책을 통하여 정보를 전달하고 종을 쳐서 대중을 모아서 즉시 그가 듣고 기록해 둔 정보를 낱낱이 공개하였습니다. 매수도강했다고 하는 자신의 허물이 드러나는 것 역시 감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애시당초 잘못은 현장의 정계(情計)에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담악(曇噩, ? 〜 1285 〜 )의 「주원측전(周圓測傳)」(『신수과분육학승전』)입니다.

대개 두 론(『유식론』과 『유가론』)을 번역해 마쳤을 때, 현장이 사사로이 그 제자 기사(基師)만을 위해서 널리 천명한 것은 전적으로 그만이 잘 할 수 있게 함이었다. 그러나, 원측이 번번이 훔쳐 듣고서 먼저 발표함으로써 그 정계를 깨뜨려 버렸다. 그렇게 법으로써 즐거움을 삼는 것이 이와 같았다.

담악은 원측과 규기의 시도를 사정(私情)에 의한 시도로서 파악함으로써, 원측스님의 시도를 사사로운 정계를 깨뜨리기 위한(破其情計)로서, 올바르게 평가하였던 것입니다. 적어도 담악의 눈에는 원측의 도강이라는 부도덕보다, 현장 --- 규기의 정계가 더욱 크게 부도덕했던 것이지요.

그러한 속깊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기록의 사실성을 우리가 계속 부정만 한다면, 그것은 곧 원측스님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현장스님을 위한 변명이라고까지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종래 학자들처럼, 원측스님이 그런 일 안했다라고만 말하는 한, 이 '현장 --- 규기의 잘못'을 지적해 내지 못하고 마는 오류/한계에 빠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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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다시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현장스님과 원측스님의 관계입니다. 현장스님이 인도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 배운 스님으로부터 원측 역시 배우게 됩니다. 사형사제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현장스님이 귀국하여 자은규기를 위해서라고만 하면서 문지기를 세우고서 강의를 할 때, 원측스님은 도강을 합니다. 종래에 이 도강을 부인하는 입장에서 여러 학자들은 애써서 현장스님과 원측스님의 사제관계를 부인해 왔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지금 해석해 온 대로 원측스님의 도강이 사실이었을 것으로 본다면 원측스님과 현장스님은 사제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비록 도강이라 하더라도 두 권의 텍스트에 대한 강의를 원측스님 입장에서는 받은 것이 됩니다. 우리가 종래 한 스승에게서 한 제자의 관계만을 상정하는 법통설의 논리에 묶여 있게 된다면, 현장스님과 원측스님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현장스님은 규기스님에게만 스승이 되겠지요. 하지만, 그러한 논리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 스승이 여럿 있을 수 있고, 한 시간이라도 강의를 들으면 제자일 수 있다는 논리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현장스님의 제자로서 원측스님의 이름을 현장스님의 전기에는 없지만, 우리는 상정/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중에 누군가 탑을 세우는데 현장스님을 중앙에 모시고 좌우에 원측스님과 규기스님을 모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곧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여기서 반론이 제시될 수 있습니다. 현장스님과 규기스님으로 이어지는 사상과 원측스님의 사상이 다른만큼, 그렇게 볼 수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사상이 다르다고 스승과 제자의 연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승과 제자라도 사상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자기 생각을 그대로 이어지기만을 바라는 것은 불법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제자가 스승의 사상과 얼마든지 다른 생각을 전개할 수 있지만, 그러한 사상의 발전의 시초에 그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이 있다면 사제관계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도강을 했다고 본다면 굳이 현장스님은 원측스님의 스승(중의 한분)이 아니고, 원측스님은 현장스님의 (제자 중의 한분)이 아니라고 할 것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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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씀드리지요. 『송고승전』의 찬자, 찬녕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종래에 찬녕마저 비판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던 것같습니다. 원측이 살았던 시대와 찬녕이 산 시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300년이라고 합니다.(김성철 박사의 제보입니다.) 이 거리를 지나서 찬녕이 『송고승전』을 쓸 때는 그때까지 전해지던 이야기를 기준으로 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이야기가 「원측전」의 내용일 것입니다. 따라서 『송고승전』의 이야기를 기준으로 해서 어떤 사실을 확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느냐는 이야기 역시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도강 여부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의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전승에 나타난 이미지의 문제로 치환하게 됩니다. 그 역시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전승에 나타난 원측스님의 이미지는 위에서 제가 해석한 바 그대로입니다. 찬녕이 이 이야기를 채록하던 시대에는 그렇게 원측스님의 이미지가 전해져 왔다는 것입니다. 불법을 사유화하려던 현장스님과 규기스님의 시도에 대해서 원측스님은 그러한 시도를 몸을 던져서(뇌물 공여와 도강이라는 허물을 무릎쓰고서라도 더욱 더 큰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저지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보면, 저는 찬녕스님을 우리가 비난하는 것은 무리라고 봅니다. 『송고승전』을 쓰면서, 만약 찬녕스님이 좋아하지 않거나 평가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무엇때문에 『송고승전』에 전기를 넣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찬녕의 평가가 들어간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숨어서 몰래 도강하는 불리한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1 대 1로 개인지도를 하면서 까지 가르쳐준 규기보다 못하지 않았다(여기서 '후'를 굳이 시간적 관점에서만 봐야 할 이유는 없을 것같습니다.)라는 평가나, 마지막 구절 천하를 나누어 가졌다(천하의 절반에서 행해졌다)라고 하는 평가는 찬녕스님이 원측스님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天下分行의 반분은 문맥으로는 규기와 나누어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장스님과 나누어가졌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 속에서의 대립구조는 현장스님과 원측스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찬녕이 원측의 성과 가문은 잘 알 수 없다고 한 것 역시 (전승 자체의 의도이든지 아니면 찬녕의 의도이든지 무관하게) 현장 --- 규기로 이어지는 당나라 토박이이면서 법상종 정통계보를 이루는 사람들에 대한 대항관계(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불법의 사적 전수와 공적 전수의 대립관계)를 보다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원측스님 자체도 신라 왕실 출신이라 하지만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그것이 과연 얼마나 권능을 발휘하였을까요? 여전히 '신라 촌뜨기' 정도의 대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식이 저변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성씨와 가문은 모른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이 「원측전」 안에서의 극적 구성(플롯)이 더 정연해 졌다고 하는 점입니다. 또한 그런 점에서 『송고승전』 원측전의 매수도강설은 자은규기 측에서의 날조라기 보다는 그러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제3자가 원측스님의 쾌거를 찬탄하는 메시지를 담아넣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찬녕은 그러한 점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김성철 박사의 의견은 찬녕은 다른 분들에 대해서보다 원측스님의 전기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을 쓴 것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송고승전』에 입전된 우리나라 스님들의 전기를 분량을 가지고 살펴볼 때, 그런 느낌이라고 합니다.)

7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역사적으로 원측스님이 매수도강하였던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다지 문제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럴 때 더욱 더 깊은 의미가 드러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원측스님의 위대성이 거기에서 또 한번 확인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여기서 마치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만약 시간이 있어서 이 이야기를 논문으로 재구성한다면, 그때는 원측 전기의 비교연구, 규기 전기의 검토, 선행연구의 재검토 등이 행해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날지 모르겠습니다. 어쨋든 그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어쩌면 제 마음 속에서 급히 종을 쳐서 대중을 불러모아서 정보를 공개했던 원측스님의 마음이 조금은 느껴져서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제가 좋아하는 스님들 명단에 원측스님의 이름을 새롭게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쁘고 행복합니다.

2007년 2월 9일

김호성 (동국대 인도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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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김호성 2008-07-01 08:40:15
답변  
앗, 오자가 있네요. 죄송합니다. "문아대사" 책의 출판연도가 1919년, 기미년으로 되어 있네요. 아마도 1999년의 오자가 아닌가 합니다만, 제가 지금 문아대사 책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탁기자님, 확인해서 좀 고쳐주실래요. 감사합니다.
김호성 2008-06-30 13:28:52
답변  
이 글에서 제가 자문을 구한 김성철(金成哲) 박사는 지금은 금강대학교 연구교수를 하고 있는 유식전공 학자입니다. 당시, 교토의 '용곡대학'에서 연구하고 있었으므로 이 글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 시간이 있다면 '논문으로 꾸며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글을 썼으면 되었지, 꼭히 논문으로꾸며야 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달리 논문 쓸 것이 쌓여있을진대 ---. 
김호성 2008-06-30 23:43:15
답변  
원측스님 진영 사진 구할 수 있으면, 이 글에 어울릴 것같은데요. 탁기자님 좀 찾아봐 주실래요?
탁효정 2008-07-01 09:38:30
답변  
원측 스님 진영 사진은 어디에도 없네요. 원측스님 사리탑 안에 봉안이 돼 있다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진영 자료사진은 못찾겠습니다. 그래서 대신 사리탑 사진을 넣었습니다. 다음에 도서관에서 다시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자 고쳤습니다. 1999년이 맞네요.
김호성 2008-07-01 15:23:03
답변  
아, 그랬군요. 원효스님이나 의상스님 사진은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진영을 그려모시고 했는데
원측스님에 대해서는 그런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했군요. 언젠가 "이달의 문화인물"이던가 선정되지 않았는지요? 아니면, 원측스님 탄생 1300주년인가도 했는 것으로 기억되는데, 어디 원측스님 진영을 안 그렸던 것같네요. 스님이 좀 외롭네요. 아니, 그런 것은 다 초월했겠지만 말입니다.
지나가려다 2008-07-01 15:53:35
답변  
원측스님 진영은 모르겠지만 흥륜사 탑옆에 있는 원측스님 부조상이 한겨례 신문에 나온 것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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