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에 대한 그리움, 고마움이 이렇게 간절할 수 있을까. 25년 전 세상을 떠난 스승의 학문 세계와 살아온 모습을 처음 조명하는 세미나를 앞둔 제자들의 모습이 애틋함을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고익진의 학문세계를 기리는 첫 학술세미나를 열흘 앞두고 그의 제자들이 기자들을 인사동의 한 음식점으로 초대했다. 이유는 스승의 학문세계를 조명하는 최초의 학술대회가 잘 치러지도록 홍보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스승 고익진 선생과의 인연담, 일화를 들려달라는 기자의 요청이 있는 순간, 간담회 자리는 감동적인 무대로 ‘돌변’했다.

“어쩌면 깊은 사색과 자내증(自內證)을 강조한다는 것은 사실 학문의 세계에서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선생님께선 강단의 한계를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을 중심으로 일승보살회라는 공부모임을 자택을 수행공간으로 삼으면서까지 연 것은 그런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제자들이 스스로 사색하고, 문제의식을 갖도록 늘 요구하고, 또 기다려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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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익진 교수와 일승보살회 회원들이 고익진 교수의 제자인 최봉수 박사가 혈리의 군법당에 군법사로 있던 지난 1987년 6월, 그곳으로 야유회 및 참배를 다녀왔을 때의 사진. 사진=일승보살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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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승보살회의 봉선사 야외법회 장면. 고익진 교수와 제자들이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일승보살회에서 처음 고익진 교수를 만나 제자가 된 이미령 선생(동국역경원)의 말이다. 이미령 선생은 비교적 어린 나이에 고익진 선생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선생님과 제자들의 공부에 대한 대화를 자주 귀동냥으로 들을 수 있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거의 100여명 이상 있었는데, 이분들이 선생님을 찾아와 질문을 하는 것이 거의 비슷했어요. 그러나 선생님은 전혀 내색을 하지 않으시고 마치 처음 그 질문을 들은 것처럼 열심히, 자세히 답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답변의 내용은 질문을 한 제자가 스스로 사색과 자내증을 갖도록 유도하시는 것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제자들에 따르면, 고익진 선생의 호 병고(丙古)는 본래 병고(病苦)에서 따온 것이다. 태생적으로 병약했고, 그 병약함 때문에 부처님(불교)을 만난 고익진 선생이 스스로 병고라고 호를 짓고는, 표기를 할 때에는 부수를 떼어냈다는 것이다.

선생의 제자이자 현재 일승보살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정하경 거사는 선생의 호에 관한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선생님께서 말년에 병이 악화되어 세브란스에 입원해 계시던 중, 아마 돌아가시기 직전에 호를 병고(丙古)로 지으신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뜻은 일생을 병고 속에서 살았으나 가실 때에는 병고를 홀연히 극복하고 열반의 세계로 간다는 뜻으로 병고(病苦)에서 부수를 떼어버린 것 같습니다.”

막상 말문이 터지자 기자간담회에 동참한 제자들의 선생에 대한 추억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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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익진 교수의 제자들이 연구실에서 토론을 하는 모습. 신춘열 법우(가운데)를 중심으로 이미령 동국대 역경위원과 고익진 교수의 아들 고승학 교수의 모습이 보인다.

“선생님께서 공부하실 때 몸이 많이 편찮으셨는데, 논문을 탈고할 때는 일주일 정도 밤샘을 할 정도의 체력이 있었습니다. 낮에는 강의하고 저녁에는 공부를 하는데, 굉장히 집중력이 뛰어나셨어요. 한번 공부하면 집중해서 하고 잠깐 주무시고, 일주일을 거의 밤샘을 하며 공부를 하셨다고 합니다. 한번은 제자인 최봉수 박사가 선생님과 누가 이기나 하며 함께 밤샘공부를 했는데, 결국 최 박사가 졌다고 합니다. 그정도로 집중력이 뛰어난 분이셨지요.”

“아이디어가 매우 좋았던 분입니다. 집이 한옥이라서 겨울에논 몹시 추웠는데, 하루는 선생님께서 난로를 들여놓고, 직접 설계를 해서 온수 보일러를 직접 설치해서 난방을 하는 지혜를 냈던 것으로 기억해요.”

“선생님께서는 마지막 이생의 인연을 접을 때에도 제자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줄려고 하셨습니다. 중환자실에 있으면서 말을 잘 할 수 없으면서도 제자들에게 그동안 공부한 것을 빨리 이야기해보라고 재촉하시고는, 필담으로 답을 해주시곤 했습니다. 그 모습이 가슴에 깊이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좌선을 하고, 또 책상에 앉아서 책보고 논문 쓰고 하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찾아와도 강의를 하시고는 함께 좌선하셨던 모습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제자들의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입원을 하셨을 때 주로 동국대 제자들이 세브란스 병실에 스티로폴을 깔아놓고 돌아가면서 간호를 했습니다 제자들의 선생님의 쾌유를 비는 마음이 그만큼 간절했고, 변함이 없었지요다. 그 마음은 지금도 똑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이 취미생활을 하는 것을 시간을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악기 다루는 제자들에게는 너는 시간이 많아서 좋겠다, 나는 공부할 시간이 부족한데…, 하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제자들에겐 24시간을 불교공부 하는 데 쏟으라고 강조하시곤 했습니다. 지금도 영화감상이나 음악감상 등 이른바 문화생활을 하려면 선생님의 그 말씀이 떠오릅니다.”

“선생님께서 세브란스에 입원해 계실 때 스승의 날이었어요. 그래서 카네이션을 들고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저를 보시고는 너 공부한 것 내놔라고 하셔서 말씀을 드렸더니, 아니라고 하시고는 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인가 알려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더 알려주시지 않으셨어요. 이렇게 스스로 알게 하는 것이 선생님의 지도법이셨습니다.”

“맞아요. 그것이 자내증을 하도록 하는 선생님의 지도법이었습니다. 예컨대 오온, 사성제가 있다면, 왜 그것을 고라고 했을까, 왜 멸이 뒤따를 수밖에 없을까, 하는 식으로 자기 스스로 사색을 해서 알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생각이 비약되거나 알음알이로 아는 것을 경계하셨어요. 개인 개인의 사색이 무르익어가는 과정을 선생님께서는 굉장히 중시하셨습니다.”

고익진 선생의 제자들은 지금도 일승보살회에서 활동하며 선생의 저술을 공부하고, 법회를 보고 수행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저마다 선생께서 유언처럼 남긴 다음의 게송을, 4반세기가 훌쩍 넘도록 가슴 깊은 곳에 담고 공부와 삶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한길을 걸어 가는 보살이여
항상 고요한 마음에 머물러
검소한 생활과 봉사에 힘쓰라
그 마음이 미묘하게 움직여지리라.

일승보살회는 고익진 선생의 입적 25주기, 일승보살회 창립 30년을 맞아 한국불교학회와 함께 병고 고익진 선생의 학문세계를 조명하는 학술세미나를 오는 12월 6일 오후 12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동국대 다향관 세미나실에서 개최한다. 대승불교 일색이었던 당시 한국불교계에 초기불교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인식시킨, 그러면서도 결국 불교는 반야, 화엄, 법화 등 대승의 보살행으로 회향해야 한다는 불자의 신념을 일관되게 펼쳤던 병고 고익진 선생의 학문세계에 대한 첫 조명이라는 점에서 매우 관심이 가는 세미나가 아닐 수 없다.

이날 학술세미나에는 고익진 선생에게 공부한 인연이 있는 이봉춘 교수가 ‘고익진의 삶과 학문세계’를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고, 역시 고익진 선생의 제자격인 이중표 교수가 ‘초기불교와 아함경 연구’를 주제로 논문을 발표한다. 이어 역시 고익진 선생 문하에서 공부한 김영일 교수가 ‘한국불교사상과 원효연구’를, 조은수 교수가 ‘한국불교전서 편찬과 과제’를 주제발표한다. 조은수 교수도 고익진 선생과 학문적 인연이 있는 학자다. 논찬자들 역시 하나같이 고익진 교수 문하에서 공부한 이미령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유동호 광동고 교법사, 최유진 경남대 교수, 이정희 전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등이 나선다. 또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번 학술대회의 원만한 성공을 위해 아들 고승학 박사(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가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익진 교수의 학문세계를 재조명 하는 한국불교학회와 일승보살회 주관의 이번 학술세미나는 그래서 딱딱한 학술행사가 아닌 훈훈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소중한 한국 불교학계의 큰 잔치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