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를 만나러 간다. 탄허는 가고 없지만, 그를 만나러 간다. 오대산 월정사. 탄허가 머물렀던 강원도 산골의 절을 찾아 가는 여정이 설레는 것은,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세계 경제가 꽁꽁 얼어붙어 서로에게 대립의 날을 세우고 있는 이 시대에 진정 마음을 열어 기댈 스승이 부재하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가치 전도의 시대이다. 욕망과 진리, 빠름과 느림, 정신과 물질이 서로 뒤엉켜 어느 것 하나 온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이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위로와 희망을 주는 스승을 찾는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탄허 만큼 유·불·선을 통찰하며 더욱이 희망을 주는 스승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 탄허를 만나러 가는 여정이 더욱 설레며 또 쓸쓸한 것은, 그는 가고 없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역저와 제자들의 사상을 통해 그 어른의 대강백을 어설프게나마 더듬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희망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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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4일 월정사 적광전에서 봉행된 탄허 탄생 100주년 다례제에서 후학 스님들이 탄허의 영정 앞에 절을 올리고 있다.

강원도의 겨울은 하얗다. 산과 들을 뒤덮은 눈은 경내 처마 위라고 다를 것이 없다. 족히 30센티는 돼 보이는 눈이 기와지붕을 하얗게 색칠했다. 그 처마 아래, ‘만월선원’, 스무 명의 선객이 삼매에 들어있었다. 누군가 산승을 디딤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고무신에 비유했던가. 내게는 조용히 입선하고 있는 스님들이 탄허의 젊은 날로 보였다. 탄허 스님은 스물두 살에 입산해 선원에서 삼 년간 묵언수행을 했다. 이후 ‘강원도 3본산 승려 연합 수련소’에서 <금강경>을 강의하기 시작해 본격적인 학승의 길을 걷게 되지만, 선교일치의 관점이 분명한 그는 선을 경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올해 동안거 해제일, 정월 대보름은 탄허가 세상에 난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동시에 그가 간지 30년이 지난 오늘, 탄허가 수행했던 도량에서 그의 법맥을 좇으며 화두 참구에 매진하고 있는 젊은 탄허들을 뒤로하고 경내 전통찻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탄허의 흔적을 품은 제자들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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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를 앞둔 만월선원, 수좌들은 선정에 들고….

“부지런히 공부하라. 공부는 인생의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탄허가 세상에 있었을 때 곁에서 그를 시봉한 상좌나 제자들이 기억하는 그는 한결같다. 제자들의 마음에 남은 탄허는 향상일로의 정신으로 인재 양성에 힘 쓴 어른이고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교학에 매진했던 스승이다.

삼척 영은사 수도원과 방산굴에서 탄허를 시봉한 임보 스님은 “스님은 우리들을 가르칠 때 ‘시간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부지런히 공부하라’고 하시며 십 분간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탄허 스님의 또 다른 상좌 삼보 스님 역시 “스님은 ‘공부가 인생의 처음이고 마지막’이라며 인격도야 할 것을 강조하셨다”며 “밥 시간이 늦었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절대 화를 안내지만도 공부에 게으름 하는 것은 아주 뼈저리게 질타를 하셨다”고 전했다.

탄허 스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다시 쓸쓸한 마음이 피어오른다. 오늘날 우리에게 인격을 갈고 닦고 부지런히 공부하라 독려하는 스승이 어디에 있으며, 게으름을 부릴 때 벼락같이 호통 치는 어른이 얼마나 있는가를 생각한다. 한국불교계에서 이런 스승은 이제 책으로나, 그 제자들로나마 만나볼 밖에 없는가 하는 슬픈 의구심.

“제대로 된 스님을 길러내는 것이 진정한 정화”

많은 고승들이 ‘눈 밝은 새끼사자’를 발굴해내는데 주력했듯 탄허 역시 인재양성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며 혼탁해진 불교를 정화시키려는 정화운동 당시 “절을 되찾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제대로 된 스님을 길러내는 것이 진정한 정화”라고 역설했던 탄허의 주장은 훌륭한 인재를 양성해내고자 하는 서원에 다르지 않았다.

출가 시기가 늦어지는 것을 차치하고라도 요즘 출가승들의 근기가 예전과 썩 다르다는 비판이 일각에서는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위대한 학승이자 치열한 구도자였던 탄허가 주창했던 인재양성의 원력은 과연 제대로 전승되고 있는 것일까.

“다릅니다. 우리가 출가할 때 우리도 선배 스님들에 미치지 못했고, 후배 스님들도 우리를 못 따라옵니다.” 탄허 스님의 제자 혜거 스님은 이 같이 말했다. 혜거 스님은 후배들이 선배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로 교육제도를 꼽았다. 서당식 교육제도를 서양식 교육제도로 바꾸면서 한 과목을 진득하게 공부하고 통달하게 되는 교육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탄허 스님도 유년 시절 서당에서 유·불·선의 초석을 닦는 공부를 했다고 하니, 그가 원체 천재적인 인물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특별한 교육제도’를 토대로 탄허 스님이 원력했던 인재양성을 하기 위해 탄허 기념박물관을 중심으로 초석을 닦고 있다는 혜거 스님은 “스님이 이루고자 했던 인재양성의 원력을 같이 가지고 이뤄가고 싶다”는 뜻을 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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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 대종사를 기억하는 이들. 왼쪽부터 정념, 삼보, 각수, 임보 스님.

“화엄사상만이라야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

탄허는 21세기는 화엄의 시대라고 단언했다. 근대 50여 년 동안 동양사상에 통달한 사상가이면서 철학인이었던 탄허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사상의 끝에 화엄세상이 올 것이라고 주창했다. 불교의 종지를 화엄경에서 찾고, 화엄사상 안에서 남북통일과 세계평화가 열릴 것이라고 했던 탄허의 의중은 여러 제자들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임보 스님은 “탄허 스님은 화엄경이 종지를 잘 밝혔다고 여기셨다. 또 화엄경을 공부하기 위해 내전과 외전을 함께 가르치셨는데, 이는 화엄사상만이라야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또 불교적으로는 출가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스님의 뜻이었다”고 전했다. 남북통일에의 원력도 화엄사상에 입각한 인재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탄허의 생각이었다.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은 “문화의 융복합이 쉼 없이 일어나며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현대인들은 정신적 혼란을 드러내고 있다. 화엄 사상은 극미(極微)의 세계부터 저 우주까지 두루 아우를 수 있고 삼세를 아우를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다양성을 두루 꿰어 세상을 조화롭게 만들 수 있다”며 탄허의 화엄사상에 의미를 부여했다.

화엄경을 국가 교과서로 지정하기를 바랄만큼 탄허는 화엄사상을 확신했다. 오래전 탄허는 갈등과 분열의 시대를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에 다양성을 두루 안아 하나의 평화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만큼 절실한 것이 또 있을까.

“남북통일은 사람이 마음 하나 내면 이뤄질 일”

핵 실험, 민간교류 중단, 금강산 관광 중단, 젊은이들 사이에서 놀이처럼 번지고 있는 ‘종북 좌빨’ 발언, 급속도로 얼어붙은 남북관계에 대한 우려… 힐링이 필요하다. 오늘날 탄허가 더더욱 가슴에 사무치는 이유는 그가 남북통일에 지대한 원력을 세운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동족상잔의 비극을 눈으로 지켜본 탄허가 통일을 주창했다는 것은 시대를 앞지르는 선견이 아닐 수 없다.

“탄허 스님은 ‘남북통일은 사람 마음 하나 내면 바로 이뤄진다’고 말씀하셨다. 문제는 ‘누가’ 마음을 내느냐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없고 온전히 나라만 있는 사람이 마음을 내야 한다 하셨다”고 전하는 혜거 스님은, 스승의 말대로 나는 없고 나라만 있는 사람이 마음을 내고, 거기에 감명 받은 사람들이 번지는 들불처럼 마음을 내다보면 통일은 저절로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제자들의 애틋한 회상 속에서 만난 탄허는 2월 24일 월정사 적광전에도 다녀갔을 터다. 월정사는 탄허 탄생 100주년, 열반 30주년 기념 다례제와 탄허 수행일화집 <방산굴의 무영수> 봉정식을 봉행했다. ‘탄허’라는 이름 아래 인연을 맺은 사부대중이 월정사 적광전을 가득 메웠고, 이들은 탄허의 영정 앞에 정성껏 우린 차와 국화꽃을 올렸다.

스님 가신 월정사에서는 여전히 후배 스님들이 수행정진하고 있고, 스님 거닐었을 마당에는 아이들이 뛰놀았다. 그는 가고 없지만 여전히 오대산자락에서 후대인들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 마음속으로 그에게 던진 수많은 질문들과 제자들의 음성을 통해 되돌아온 답을 품고 오대산을 떠나는 발걸음이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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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거를 마친 선원 수좌들의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