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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평론 살리는 데 지식인들 나서라”<br>법응스님, 무기력한 교계 지식인들 질타

이학종기자 | urubella@naver.com | 2012-09-24 (월) 10:38

“폐간이 결정된 <불교평론>을 살리는데 지식인들이 나서라!”

‘21세기 아쇼카 선언 추진’ 등 교계 현안에 대해 성역 없는 비판과 대안을 제시해온 법응 스님(불교사회정책연구소)이 불교계 지식인들에게 쓴 소리를 던졌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만이 불교평론 폐간에 항의하는 뜻으로 경허선사열반100주년추진위원회가 주관하는 학술세미나에 불참하는 통보를 했을 뿐 그 많은 불교계 지성인들이 이 사태에 침묵하고, 사실상 폐간에 순응하는 모습을 질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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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의 대표적인 '쓴소리' 법응스님이 불교계 지식인들의 불교평론 살리기 노력을 촉구하는 기고문을 미디어붓다에 보내왔다.

법응 스님은 9월 24일 <미디어붓다>에 보내온 특별기고를 통해 “이미 불교평론은 재단이 좌지우지하기에는 불교학계를 비롯한 전 불교계가 주인이 된 것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렸다”며 “특정 재단에 의해 경영되면서도 사실상 공공의 자산이란 성격을 구축해온 <불교평론>의 폐간 결정에 대해 편집진과 그동안 글을 투고한 분들은 발행인에게 폐간을 만류하는 다양하고도 심층적인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 불교계 유일의 논단지라 할 때 스스로 자구노력을 해야 상식이며, 자신의 학문에 대한 예의가 아니냐는 것이다.

법응 스님은 교계 지식인들을 향해 “시위를 하라는 주장이 아니다. 인내와 애정을 갖고서 설득과 이해를 구하고 공백기를 갖고서 폐간만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촉구했다. 최소한 항의의 몸짓이라도 보여야 불자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며 <불교평론>이 이대로 사라지게 된다면 잡지와 관계한 학자들의 책임론도 거론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오늘의 불교 현실에서 불교학자들마저도 권력이나 문중, 이름 있는 승려나 집단의 눈치를 보고 순응한다면 불교의 미래는 너무나 참담하다”고 전제한 법응 스님은 “더는 그 말을 언급하고 싶지 않으나, 지난 번 아쇼카 선언 파동 때도 불교학계는 너무나 무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불교학계 학자들의 무기력함을 질타했다.

“언어가 죽고, 문화가 죽고, 사상과 신념마저 스러진 다음, 불교는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라고 반문한 법응 스님은 “오히려 경허선사의 행장과 그에 따른 다양한 견해의 글이 활발하게 발표되어서 오늘의 불교가 나아갈 방향을 바로잡아주기를 기대하며, 참여와 성찰을 토대로 미래를 열어갈 때 불교는 비로소 희망이 있다”고 주장했다. 법응 스님은 단말마와 같은 일구로 불교계의 현실을 풍자하며 기고문을 마무리 했다.

“정녕 2012년, 불교계의 현실은 ‘죽은 말(馬)’에 침놓기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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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평론 폐간, 지식인사회가 나서라!

불교평론 홈페이지에서 소개 코너를 들어가 보면 회사약도와 주소 그리고 전화 연락처만 등재돼 있다. 발행목적, 비전 등 이 잡지가 불교계 및 사회에 공헌하고자 하는 의도 등 세세한 정보를 알 수가 없다. 이 잡지 자체의 운영체계와 잡지의 발행의 견고성 확인차원에서 알아보려고 한 것이다. 단지 (재)만해사상실천선양회에서 발행하는 것으로 확인될 뿐이다.

불교평론은 그동안 논문상 공모를 통해 연구의욕을 고취시키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주장과 이론을 펼칠 적당한 매체를 찾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기회의 장이 되어줌으로써 불교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한 사람의 불자로서 특정 주장에 대한 개인적인 동의 여부를 떠나, 사회적 과제에 대한 불교의 시각과 현대적 해석에 목말라 했던 사람들에게 불교평론이 아니었다면 그 갈증을 누가 달래주었을까 싶다.

불교계에 제대로 된 학술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 (재)만해사상실천선양회와 어렵게 연구한 논문을 제공한 교계 안팎의 학자 논사들, 그리고 편집 실무를 담당하며 수고한 관계자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그런데 발행처인 만해사상실천선양회는 2012년 가을 호에 실린 윤창화 민족사 대표의 ‘경허의 주색과 삼수갑산’이란 글을 문제 삼아 폐간을 결정했다.

경허 스님은 지금까지 근대 선불교 중흥조로 추앙받아 왔다. 그러한 스님을 흠결이 없는 완전한 인격체로 대중이 인식하기를 바라는 것은 자부심에 찬 해당 문중의 후학들로서는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던 차에 윤 대표의 글이 발표되었고 화제가 되었다. 위상과 명예,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판단한 문중은 섭섭함을 토로했고, 끝내 문중간의 갈등이 잡지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재단측으로 하여금 폐간 결정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리게 했다는 것이 저간의 사정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러 사람들이 우려와 실망을 표하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청천병력일 수 있다. 그런데 관련 보도를 접하며 필자는 윤창화 선생의 글과 폐간을 결정한 만해사상실천선양회는 좀 옆자리로 비켜 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리고 불교평론의 편집과 발행에 애써 온 실무진과 여기에 논고를 제공해온 교계 학자, 지식인들을 중심에 놓고서 한마디 하고자 한다. 이분들은 주로 불자 교수 신분이거나 불교와 관련한 분야의 전공자들이다. 한마디로 사상과 철학이 분명한 분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교계의 매체를 아무리 뒤져도 위에 언급한 이들 중 누구도 ‘폐간’이란 극단만은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거나 무슨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소식은 없다. “현대판 분서갱유”라 일컬어지는 이 사태에 동국대 김호성 교수가 저항의 표시로 『경허선사 열반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학술세미나에 불참을 통보했다는 소식이 거의 유일하다. 그 많은 교계 지성인들이 사실상 잡지의 폐간에 순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불교평론은 재단이 좌지우지하기에는 불교학계를 비롯한 전 불교계가 주인이 된 것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렸다. 특정 재단에 의해 경영되면서도 사실상 공공의 자산이란 성격을 구축해 온 것이다. 그렇다면 편집진과 그동안 글을 투고한 분들은 발행인에게 폐간을 만류하는 다양하고도 심층적인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불교계 유일의 논단지라 할 때 스스로 자구노력을 해야 상식이며, 자신의 학문에 대한 예의라 생각한다.

시위를 하라는 주장이 아니다. 인내와 애정을 갖고서 설득과 이해를 구하고 공백기를 갖고서 폐간만은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최소한 항의의 몸짓이라도 보여야 불자들도 희망을 갖는다. 불교평론이 이대로 사라지게 된다면 잡지와 관계한 학자들의 책임론도 거론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의 불교 현실에서 불교학자들마저도 권력이나 문중, 이름 있는 승려나 집단의 눈치를 보고 순응한다면 불교의 미래는 너무나 참담하다.

더는 그 말을 언급하고 싶지 않으나, 지난 번 아쇼카 선언 파동 때도 불교학계는 너무나 무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전문 학자인 본인들조차 선언문에 문제가 있는 구절이 있다고 판단되거나 정서적 공감이 일어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 지적과 참여를 통해 길을 잡아주었어야 하고, 필자처럼 비판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정녕 문제였다면 솔직하게 견해를 밝히고 여론의 장이 공평하고 공정하게 형성될 수 있도록 조정하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언어가 죽고, 문화가 죽고, 사상과 신념마저 스러진 다음, 불교는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불교평론 폐간을 반대한다. 오히려 경허선사의 행장과 그에 따른 다양한 견해의 글이 활발하게 발표되어서 오늘의 불교가 나아갈 방향을 바로잡아주기를 기대한다. 참여와 성찰을 토대로 미래를 열어갈 때 불교는 비로소 희망이 있다. 정녕 2012년, 불교계의 현실은 ‘죽은 말(馬)’에 침놓기란 말인가?

/法應(불교사회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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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운정 2012-09-24 13:5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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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지식인에게 무슨 힘이 있나


불교지식인에게 무슨 힘이 있으며, 불교학자들에게 무슨 힘이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법응스님 자신도 조계종단 형편을 잘 알고 있을 것인데, 이제와서 불교지식인 운운 하는 모양이 좋게 보이지 않는다.

조계종은 지식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교단이다. 왜냐하면, 조계종단은 지식이나 상식과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조계종은 높은 가치를 귀중하게 여기는 판단지성이나 누구나 갖추고 있는 상식을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고 잇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속에서 생각의 근원을 찾는다.
생각의 근원에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생각의 근원에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고 존재의 궁극적 근원을 찾는다.
존재의 궁극적 실체가  불가시세계에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눈을 부릅뜨고 불확실한 존재의 궁극적 실체를 보기 위하여 인문학을 공부하고 과학을 공부한다.  그런데, 조계종은 인문학이나 과학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인문학이나 과학을 공부하는 학자를 별로 공경하지도 않는다.
조계종의 토양 자체가 이러한데, 여기에 무슨 참다운 학자가 있을 것이며, 올바른 지식인이 있을 것인가.
만에 하나 학자가 있다면 자기들 말을 잘 듣는 몇 사람의 아류들만 있을 것이다.
이러한 조계종의 실정에 비추어 볼 때, 불시에 법응스님이 나서서 지식인을 찾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평소에 지식인을 우습게 여기던 이들이  이제와서 지식인들에게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라고 蹶起辭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힘없는 불교지식인들에게 그런 궐기사를 할 것이 아니라 법응스님 자신이 일어서서, 도반들을 모아 불교평론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운정 2012-09-24 14: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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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의 불교 현실에서 불교학자들마저도 권력이나 문중, 이름 있는 승려나 집단의 눈치를 보고 순응한다면 불교의 미래는 너무나 참담하다."
이와 같은 법응스님의 불교 현실에 대한 진단은 비교적 명확하다. 불교의 미래는 너무나 참담하다.
<2>
조계종 근처에 살면서, 금오문중, 경허문중, 동산문중, 서옹문중, 구산문중, 경봉문중 등등 이름 있는 문중과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높은 승려와 집단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되는지 법응스님 자신도 익히 알고 있을 터이다.
불교 현실을 익히 알고 있는 법응스님은 왜 오늘과 같은 불교 현실이 되었는지 엄밀한 진단을 해 보았는가. 그리고 엄혹한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 보았는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닦아 보았는가.
<3>
누군들, 말로 하는 현실 진단쯤이야 할 줄 몰라서 침묵하고 있겠는가.
1960년대에, 법정스님께서, 이미, 조계종은 찢어진 북이라고 진단을 내렸었다.
법응스님도 "불교의 미래는 너무나 참담하다"는 말을 하기 이전에 밝은 미래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면서 조용히 깊은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법응스님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불가시세계에 함장되어 있는 "존재의 궁극적 실체"를 발견한 후, 국내의 유수한 대학들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재의 궁극적 실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일이다.
원불사 단현 2012-09-24 14:5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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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일사천리로 폐간 명령을 받아들인다라고 사과하고 돌아서는 불교평론 인사들이나 수덕사, 그리고 오현스님 등의 행태가 하도 기가 차서 일언반구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존경하는 법응스님의 글에 한 줄이라도 예를 표하지 않을 수 없어 몇 자 적습니다.

불교평론은 우리 불교의 자존심입니다. 한국 불교사에 유일무이한 학술지로 최고의 권위로 모든 불교학자들의 등용문이었고 영광이었습니다. 참신한 논문들이 분기마다 실려 우리 불교의 깊고 넓은 학문세계를 자랑해 왔던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런 학술지가 단 한편의 글로 인해 폐간된다는 것은 우리 불교에 여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님 말씀처럼 아쇼카선언 사태 때 보여준 어용들 뿐인 그 똑똑한 스님이나 불교학자들의 비열한 모습을 되돌아 보면 스님의 이 주장 역시 봄철 아리랑이나 물거품이 될 뿐입니다.
안타깝지만 한국불교의 불자나 지식인들에게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법응스님 마음 편안하시길 빕니다_()_
하나같이 똑같다 2012-09-24 15:4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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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질 놈은 쓰러져야지  ""불교평론은 우리 불교의 자존심...한국 불교사에 유일무이한 학술지로 최고의 권위.....모든 불교학자들의 등용문이었고 영광......참신한 논문들이 분기마다 실려 우리 불교의 깊고 넓은 학문세계를 자랑""  정말야!!!    니네들만의 리그였지.  교수 몇 명의 아사리판이었던 거야!  일반독자들 안중에나 있었냐?  니네가 재단하고 들이댄다고 어디 대중이 꿈쩍이나  하던?
내공니공 2012-09-24 22:03:47
답변  
이곳은 비교적 폐간사태를 비판하는 글이 주를 이루고 있네요.
다른 불교사이트에 가보니 승려들로 추측되는 사람들.... 경허를 폄하 했다고 악을 쓰고 욕설을 퍼붓고 난리더군요.
이건 뭐..... 수행하는 중들이 아니예요. 잡배들 입에서나 튀어나올 듯한 소리를 질러대고, 알 수도 없는 경전구절이나 엉뚱하게 갖대대어 몰아치고.... 이게 바로 한국불교의 수준이더군요.
절벽입니다. 승려들하고는 말을 섞지 말아야지... 도대체 소통이 안 되어요.
그들은 일반인들의 눈에 그들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지.... 전혀 모른다는 느낌입니다.
^^ 2012-09-25 11:5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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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님은<승려들로 추측되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추측"이라고 말하면서  <수행하는 중들이 아니예요> 단정짓는 군요.

난 여기저기 불교언론댓글란에 경허를 옹호하는 댓글을 많이 달았습니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난 승려가 아닙니다.
당신입장에서야 제가 승려여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잡배들 입에서나 튀어나올 듯한 소리? 그건 경허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더했으면 더했죠.
입은 삐뚤어져도 바로 말씀하세요.
바로 위에 원불사단현이란 자는 경허를 향해 "개씹"을 즐겼다, "개망나니짓"...불자로 살면서
승려에게 그런 참혹한 말을 하는 불자는 난생 처음 봤습니다.
경허를 옹호하는 자들 가운데 원불사 단현만큼 쌍욕을 하는 사람들 없었습니다.
내공니공님도 눈이 있어 봤을 거 아닙니까.

님은 경허를 비난하는 입장이니 경허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하는 참혹한 욕지기들이 안보이나 봅니다. 경허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말이 "잡배들 수준이면" 원불사 단현의 말은 어디에 비견하면 좋겠습니까.

경허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수준은 어떠합니까.

요즘 세상에도 "소문"을 근거로 타인을 험담하는 경우 지탄을 받습니다. 아무개가 누구랄 어쩌구저쩌구 했다더라,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겠냐면서 "소문"을 기정사실화 시켜 비난을 하고 그러죠. 그러다가 명예훼손, 허위사실 유포로 처벌받기도 합니다.

윤창화가 윤창화 논문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경허에 대한 일화들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위인지 모르겠다....불교계에 공식적으로(문헌으로) 경허일화들이 남겨진 경두도 거의 없다. 특히 한암스님이 남긴 경허집에는 경허의 일화가 전무하다..."

저의 말이 아니라 윤창화가 논문속에서 한 말입니다. 한마디로 전해내려오는 경허의 일화는 많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공식기록에 남은 몇개의 단서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경허가 소문들에서 완전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정도 추측이죠? 그런데 윤창화는 자신의 이 추측을 기반으로 "경허는 자신의 행위를 후회했고, 부끄럽고 창피해서 삼수갑산으로 몸을 숨겼다"로 단정해 버리잖아요. 그러면서 현재의 한국승려들이 타락한 것은 모두 경허때문이라고 다시한번 단정해 버리죠.

내공니공님은 소문과 정황을 근거로, 추측을 근거로 단정하고 확정하고 확신합니까, 일반인들은 그럴 수 있는데 학자가 논문이라는 형식으로 이렇게 말하면 곤란하죠.

윤창화는 차라리 칼럼을 썼서야죠. 경허의 실제 삶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경허의 일화들이 소문이긴 하지만 그 소문이란 것도 여기저기 내용이 다 달라서 어떤일화가 더 사실에 가까운지도 모르는 상황,,,이런 전제를 깔고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칼럼형식으로 썼으면 지금처럼 욕먹었을까요?

난 일반재가불자로 경허에 대해 굴고 간략하게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 논란이 생기면서 경허에 대해 아주 세세하게 알게 됐죠. 이런 점은 윤창화에 대해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경허같은 자를 속속들이 몰랐을 테니까요. 윤창화는 경허를 비난하려 논문을 썼겠지만 저는 반대로 경허를 더 알게되어 지지하게 됐습니다.

제가 중이어서 경허를 옹호하는게 아니라 윤창화때문에 경허를 공부하게 되었고 공부하니까 경허가 보여 옹호하는 것입니다. 그가 남긴 오도송과 선시, 경허와 여러 고승이 주고 받았던 서신, 당시 스님들이 경허를 만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경허의 법문을 듣기 위해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았던 사실들.... 긴 시간 투입하여 많이 봤습니다.

경허는 당신들이 말하는 개잡놈도 아니고 "개씹이나 즐기는 승려"는 적어도 아니라는 사실, 경허가 자신의 행위를 후회할 인간도 아니고, 자신의 행위를 부끄럽고 창피하게 여겨 삼수갑산으로 숨을 인간도 아니란 것은 경허를 공부해 보면 보여요. 타인의 시선이 아닌 당신눈으로 직접 경허를 목격하세요.

제가 절에 근무한 경험과 여러 스님들과 교류하는 입장에서 말하는데 수행승들은 불교게시판에 댓글 안달아요. 수행자들은 댓글 달면 금방 표가 나요, 그들 특유의 글쓰기가 있어서. 경허를 옹호하니까, 남들보다 좀 깊게 불교에 대해 말하니까 아 이자는 중놈이구나! 하고 확신하는 것 같은데, 세상은 넓고 뛰어난 재가불자들 널렸습니다. 스님들이 얼마나 이기적인데 번거롭게 댓글 달아요 달길. 중들 습성을 모라도 너~무 모르시네.

내공니공 2012-09-25 13:15:19
답변  
저의 논제를 잘못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경허를 폄훼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경허를 두둔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번 사태는 경허가 어떠냐 저떠냐가 아닙니다. 학술적으로 어찌 평가를 하든 경허가 세상에 돌아와 자신을 옹호할 일도 아니겠고, 경허와 같은 시대에 살아보지도 못한 학자들이 뭐라고 하든, 그 진실이 밝혀질 일도 아닙니다. 또한 중들이 댓글을 달든 안 달든 그것도 문제가 안 됩니다. 물론 저는 중들이 댓글을 단다는 전제하에 있지만 말입니다.

요는 최고의 종교세력이 힘없는 일개 언론을 탄압하여 폐간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서양 중세시대의 종교재판처럼 말입니다.
근래 '순진한 무슬림'이라는 영화 한 편으로 중동 전체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런 기사를 보면 종교가 곧 폭력의 원천 같고, 현금의 폐간사태도 역시 그에 버금가는 일종의 알레르기 증상이라는 판단입니다.

종교는 누구를 숭상하기 위하거나, 자기 문중 지키려고 이용하는게 아닙니다. 경허는 경허고, 오늘의 수행자는 오늘의 수행자일 뿐입니다.
부처건 조사건 만나는 족족 죽여버린다는 그 기개와 패기는 어디로 갔습니까? 우리 불자는 죽은 경허보다는 살아있는 수행자를 원합니다. 옛 조사들의 어록이나 들추기보다는 눈 앞에 선 수행자의 펄펄 살아있는 깨달음이 기다려집니다.
기독교의 성경책이 수억권이면 뭐하고, 8만대장경이 8만배나 쌓이면 뭐하겠습니까,
산 깨달음이 없는데 말입니다.
내공니공 2012-09-25 13:19:07
답변  
가장 중요한 말이 빠졌군요.
힘 없는 언론이나 돈으로 폐간시키는.... 그런 치졸한 짓은 더 이상 하지 마십시오. 보기 역겹습니다.
^^ 2012-09-25 15:31:50
답변 삭제  
윤창화의 경허왜곡을 지지하면서 경허를 폄훼하지 않았다구요?
제발 좀 솔직해 지십시오.

위에서 경허 옹호하는 자들을 "잡배들"로 묘사하지 않았습니까?
경허 옹호하는 자들이 수행자들이라며 추측 했고
그 수행자들을 "중들"이라고 폄훼하기도 했죠.

그리고 만해사상선양회는 종교권력단체가 아닙니다. 평론지는 대중의 언론도 아니구요. 만해사상선양회와 불교평론은 계약관계로 갑을 관계 입니다. 갑이 계약상 불이익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을과 관계를 청산할 수 있습니다.

종교세력이 힘없는 일개 언론을 탄압했다구요? 당신은 당신이 구멍가게를 운영하다가 가게를 접으면 종업원을 탄압한 것이 됩니까?

중세시대 운운하시는데 중세시대는 종교=국가 일치하는 사회였습니다. 아니 종교가 국가위에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의 일을 현재벌어진 불교평론과 비교하는 거 자체가 심각한 왜곡입니다.

윤창화의 논문을 비난하는 자들이 윤창화의 가족에 테러를 가했습니까? 윤창화의 친인척 집에 방화를 했습니까? 아니면 윤창화와 연관된 사람들에 위해를 가했습니까? "순진한 무슬림"사건이 이번 사태와 무슨 상관입니까? 과대망상입니다. 윤창화는 불교평론이 아니더라도 학문하는데 지장없구요. 이번 사태 이후에도 윤창화를 종단내 특정세력이 계속 괴롭히거나 인권과 자유를 침해할때 그때 종교권력의 탄압이라는 표현을 쓰는 겁니다. 당신이 지금 쓴 댓글 역시 알레르기 증상입니다. 남이 경허를 두고 싸우든 말든 당신 어법대로 경허 논란은 경허 논란이고 당신은 당신일 뿐이지 않습니까?

남이 옛 조사 어록을 꺼내든 말든 그들은 그들이고 당신은 당신일 뿐인데 왜 댓글 달면서 골치아파 하십니까?
산 깨달음이란 "당신이 직접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산 깨달음은 남이 당신에게 전해주는게 절대 아닙니다.
아직도 그런식으로 산 깨달음을 줄 어떤 이를 기다리고 계신다면 당신은 죽을 때까지 결코 부처를 만나지 못합니다.

나뭇꾼 혜능은 남이 읽는 경전소리를 듣고 멈춰 깨달았습니다. 그 남은 혜능을 깨우치려고 경을 읽은게 아니었습니다. 무슨 얘긴고 하니 불교는 결국 당신의 상태에 따라 깨치고 안깨치고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남의 말이 안들린다는 말은 결국 님은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니면 남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준비가 안됐다는 말입니다.

불가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깨달음을 가져다 줄 스승을 기다리기 전에,
내가 깨달을 준비가 된 제자인지를 점검하라" 아시겠어요?

조사든 선사든 초기불교 강사든 대승논사든...그 누가 됐건 당신은 진실한 마음을 내어 그들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애쓴적이 있나요? 불법을 배우려는 마음이 절절하여 어떤 스님의 말씀을 노트에 한글자 한글자 적어보고 곱씹어 보거나 궁굼한 법문을 듣기 위해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탁 물어물어 찾아가 법문에 참석한 열정은 있었나요?사마타,위빠사나 수행을 위해 토요일이나 일요일 통째로 투자하신 적이 있나요? 친구나 가족을 만나지 않고 인터넷이나 TV, 전화를 끊어 놓고 오로지 자신의 내면만 들여다 본 적이 있나요? 밤새도록 경전을 읽고 다음날 경전속의 내용을 일상생활에서 써먹으려고 노력해 봤나요?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조사의 어록이던 뭐던 남이 하는 법문이 당신의 마음깊숙한 곳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내가 준비가 안된 상태라면 아무리 뛰어난 법문을 들어도 나와 상관없는 귀신씨나락까먹는 소리에 불과하죠. 님이 산 깨달음을 못느끼는 것은 전적으로 님탓이지 법문해 주는 사람들탓이 아닙니다.!
내공니공 2012-09-25 18:18:34
답변  
선생님의 이 글.... 고스란히 돌려드리겠습니다.

불가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깨달음을 가져다 줄 스승을 기다리기 전에,
내가 깨달을 준비가 된 제자인지를 점검하라" 아시겠어요?

선생님께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아시겠어요?
^^ 2012-09-25 18: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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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데요.

"조사 어록이나 들추기 보다....산깨달음이 없는데" 라고 말씀하신 것은 님입니다.
저는 스님들한테 "조사어록이나 둘추고...산깨달음 못 준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없네요.
그래서 님이 저한테 돌려주어야할 의무도 발생하지 않아요?
법문이 어렵다, 자기들끼리만 아는 말로 떠든다, 자기말이 없고 옛조사 어록이나 들추어낸다....이런 불평불만을 저는 하지 않았어요, 불평불만은 님이 하셨죠. 아시겠어요?

님은 저한테 돌려주고 싶어도 돌려줄 수도 없어요, 저한테 해당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요
내공니공 2012-09-25 18: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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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말꼬리를 잡아 빈정거리지 마십시오.
저도 한 번 선생님의 말꼬리를 잡아봤지만, 그런 논박은 천박하지 않겠습니까.
댓글 사절하겠습니다.
불자 2012-09-27 11:13:08
답변  
경허스님의 문제는 간단한 것인데, 그의 오후보림이 잘못되었나 잘되었나만 보면 되는 것입니다.
이 기사의 앞 기사가 돌연 사라졌군요.
답답한 일입니다.
폐간의 문제는 일개 잡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한국불교의 문제를 볼 수 있는 것이기에 그냥 넘어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전 이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진정 바랍니다. 
한국불교사에서 아주 안좋은 선례를 남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술적인 문제제기가 잘못되었다면 끝까지 불을 붙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인데, 폐간이란 조치로 문제를 덮어버렸으니, 이는 스승없이 홀로 한국불교의 선풍을 다시 일으켜 세우신 중흥조 경허당의 위업을 잇지못하는 처사입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위업을 완성할 책무가 있는 것인데, 백번을 양보해서 경허당의 보림이 옳다거나, 경허당이 공부를 마친 후 그런 행리를 보였다면 그것도 잘못이 아니라는 분명한 말씀들이 있어야 하는데, 단 한마디도 없이 그냥 덮어버렸으니, 경허당의 돈오의 위업을 이어 후학이 전혀 노력을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공부로 미치지 못하면 지향할 바를 학술적으로라도 모든 불경과 조사어록을 뒤져서라도 밝혀봐야 할 것입니다.
다 막아버리고 대체 어떻게 공부하겠다는 것인지, 맞겠거니 하는 것인지? 틀렸으나 따른다는 것인지? 알고도 경허당의 위상을 위해 모른체 하는 것인지? 이 셋이라면 범계를 하면서도 사람을 위했던 경허 스님께서도 꾸짖을 것입니다.
왜 경허스님의 위업을 이어 계승하려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스승의 보림공부가 정말 제대로 되었는지 공부로 밝혀 세상에 명확하게 드러내 준다면 스승없는 척지에서 홀로 고분분투한 경허 스님이 절대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좋아하실 것입니까?


그 모두는 모두 경허당이 뿌린 씨앗에서 나온 열매가 될 것입니다.
스승을 뛰어 넘어야 가히 그 법을 전해준다는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학술적으로 규명해 보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로인해 불교 수행의 결기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문제는 깨달음의 문제이며, 깨달음 이후의 문제이고 중생을 건지는 문제라서, 불교 핵심의 문제이고, 불교만대의 문제입니다.
여전히 돈오점수니 돈수니 하는 문제조차 판가름짓지 못하는 한국불교계의 병폐는 모두 여기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불법의 혜학이 자리잡으면 계정도 자연 바로 잡히는 것입니다.
정견이 바로 서지 못하니, 다른 것도 이견이 분분하여 실제 행에 있어서는 어지러워진 것이 이나라 불교의 병이라 생각합니다.


학술적으로야 끝장토론이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걸 그냥 덮는 것은 불교의 문제를 덮어두어 불교를 고사시키자는 것과 다름없으니 불교의 반역이 아닙니까?
적반하장 2012-09-27 11:41:11
답변  
님은 "소문"이 학술적으로 다뤄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을 스스로의 양심에 질문해 보십시오.

알려진 소문의 내용도 여기선 이렇다 저기선 저렇다,다 다른데 말입니다. 그 중 어떤 걸 학술적으로 다뤄야 합니까.

아무개 스님이 은처가 있다더라,는 소문이 학술적으로 다뤄질 수 있다는 발상이 이해가 됩니까. 일단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한 이후 사실로 판명됐을 때나 학술적으로 다뤄질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지요. 이런 기본적인 사실확인 조차도 안되는 것을 성급하게 학술적으로 다뤄 결론내리는 것은 학자적 양심도 없을 뿐더러 학자의 소양도 부족하다는 얘기지요. 폐간이 옳으냐 그르냐와 별개로, 학술이 아닌 걸 자꾸 학술이라고 주장하는게 온당한가 저는 묻고 싶네요.

경허문도들 입장에선 학술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고인에 대한 폭력이자 테러입니다. 학문이란 이름으로 고인을 난도질해서 문도들이 느낀 충격과 참담함, 내새끼라고 생각했던, 그리하여 지원까지 했던 불교학자가 등뒤에서 칼을 꽂아버린 것 같은 배신감, 피해자 입장은 전혀 생각 안하는 겁니까?

경허문도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피해자입니다. 헌데 님들은 가해자인 윤창화를 오히려 학문의 자유를 말살당한 피해자로 둔갑시킵니다. 폐간으로 밥줄 끊어진 약자로 오도합니다. 이게 정의라고 할 수 있나요?
불자 2012-09-27 12:33:06
답변  
밥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윤창화씨 개인의 문제도 아닙니다.
돈오보림이라는 차원에서 다시 논해져야 하는 일입니다.

과연 경허당은 스스로 공부를 마쳤다고 생각하고 그랬는지,
여기 그랬는지에 대해서 소문이라 말씀들을 하지만 제자들이 이구동성 파계의 행리에 대해 수긍하고 있고 한암스님 같은 경우도 경허스님을 모르는 이들은 행리를 따라하지 말라고까지 하고 있으니, 그 행리가 어찌 파계가 아니라고 부정할 것입니까?

최소한 중계인 5계를 다 지키지 않았으니 파계입니다. 
파계와 보림의 문제로 우선 다뤄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돈오점수 돈오돈수 그리고 보림을 마친 대오 그리고 입전수수의 중생구제 등 이런 것이 두루 연결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허실을 살펴 이 기회에 경허스님의 공부도 온전히 알고 한국불교의 주춧돌인 경허당의 업적위에 건물을 제대로 짓는 일인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소문이면 어디까지가 소문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도 밝혀보는 것도 학술의 영역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경허스님을 바로 알아야 경허스님의 위업도 잇는 것입니다.
경허당께서 이만 일로 그 위상에 위해를 입는다고 생각한다면 저로서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경허당의 면목은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는 그분의 정진에 있고, 무엇보다 그의 무사자오한 깨달음에 있습니다. 

경허당의 돈오는 너무도 분명하여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모든 그분의 제자 손제자들이 확연하게 입증한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평론이나 그 누가 비평한 다하여 이런 분명한 사실이 터럭인들 손상될 것입니까?

그러나 보림에 있어서는 다른 것입니다.
이는 붓다 이후의 역대조사들의 행리와 비교해 볼 수 있기 때문이고, 그의 돈오가 비록 장하나 역대조사 누구도 한번 깨달아 일마친 이가 없었으니 당연히 검토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본래 경허당의 파계는 오래전부터 알려져온 사실입니다.
그것이 깨달은 자의 무애행으로 다수의 대중들에게 인식되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공부에는 한점 사사로움이 없는 것입니다.
과연 경허당의 보림은 바른 보림인가 하는 문제제기입니다.
이것은 후학의 공부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공부를 마쳤다고 할 때 그런 행리가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깨달음 이후의 일은 불교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에 있어 사부대중의 정견을 가름짓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경허당이나 불교평론 폐간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불교 전체의 문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허당은 한국불교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대승적 차원에서 이 일이 다뤄지기를 학수고대 합니다. 
 
적반하장 2012-09-27 14:03:08
답변  
문제는 윤창화가 어디까지가 소문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본인도 모른다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본인도 모르는 그 파계소문을 근거로 어떻게 경허가 자신의 삶을 후회했고 부끄러워 말년에 숨었다고 결론내렸으며 더 나아가 현재 한국승려의 모든 병폐의 원흉이라는 말도 안되는 결론을 도출한 것이죠?

윤창화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자들이 경허를 개망나니짓을 하는 수준이하의 잡승으로 표현하면서 현재의 승려들까지 싸잡아 비난하고 있죠. 그런데요 경허가 개망니짓하는 수준이하의 잡승이 될때 경허에게서 인가받은 조선조말년 이후 모든 고승들의 인가는 취소돼야만 합니다. 깨닫지도 않은 사기꾼 잡승한테서 인가받았으므로 만공은 물론 한암의 깨달음도 인정되지 못하게 됩니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윤창화는 한국불교를 통째로 전면부정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허이후 지금까지 고승들이 전부 경허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인가받았기 때문입니다.

한암스님이 경허의 법화를 배우되 행리는 배우지 마라, 는 경허의 행리에 주목하게 될 경우 경허의 법화를 못 보기 때문입니다. 윤창화나 님이나 경허의 행리에만 주목할 뿐 전혀 경허의 법화를 못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경허를 일개 파계 잡승으로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한암의 우려는 바로 님과 윤창화같은 사람들 때문이죠.

제가 위에서 "소문"을 근거로 "소문에 대한 사실확인이 없이" 학술활동할 수 있냐 물었던 까닭도 결국 우리는 경허의 법화를 학술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당위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경허의 저술만이 유일한 팩트이고 어떤 소문이나 풍문도 끼어들지 못하는 여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암스님말씀을 님의 취지로 해석한다고 할때 가장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사실"입니다. 경허의 구체적인 행리의 사실을 말하고 나서 파계했다 안했다 따질 수 있는 것이지요. 윤창화등이 경허가 여자와 동침했으므로 파계했다는 근거중 가장 많이 인용하는 것이 문둥병 여인을 경허자신의 방에 몇달간 재웠다는 근거죠.

"방에 재웠다는 말"이 곧 "음란한 행위를 했다"는 의미입니까? 윤창화는 그걸 밝혔어야 했어요. 경허가 여인과 음란한 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밝혀놓고 파계를 했다고 주장해야 학술이죠.몸에 고름나는여인과 어떤 남자가 동침할 욕구가 생기는지 궁굼합니다. 경허가 변태성욕자 였다는 얘긴가요?

문둥병 걸린 여인이 절 공양간에서도 구박받고 굶주리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 고름나는 몸을 가진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합니다. 모두 외면하는 그 병자를 경허는 자신의 방을 불러 들이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고름을 닦아 주며 몇달을 함께 한방을 썼습니다.

밖에서 보기엔 스님이 여자와 동침했다고 판단하겠죠. 그러나 갈곳없는 불치병환자를 그 시대, 그 장소에서 경허만이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녀에게 자비를  배풀지 않았습니다. 중생들 눈엔 그저 경허가 여자와 한방을 쓴다는 사실에만 분노할 뿐 그녀가 문둥병걸린 환자라는 다른 사실은 보이지 않습니다. 굳지 경허스님방에 재웠어야 했냐 하겠지만 어떤 승려나 신도가 자신의 방에 문둥병걸린 여인을 들이겠습니까. 그녀가 사찰을 떠날때의 남긴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경허스님의 자비로 인해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감사하다"

이에 대해 경허스님은 "인연없는 중생은 구제할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문둥병 걸린 여인은 아직 떠나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사찰내 스님들과 경허스님의 친어미가 그녀를 내보내라 성화를 하는 통에 그녀가 경허스님께 미안해서 떠났던 것이죠.

경허가 자신의 방에 이 환자를 들였을 때 절안은 물론 밖에까지 어떤 소문이 퍼졌겠습니까. 사람들은 "음란한 경허"를 기정사실화 했겠죠. 한암은 중생들이 주목하는 경허의 소문들, 이른 바 행리에 자꾸 신경쓸때 경허의 법화를 못본다는 것입니다. 실제 경허가 음란한 행위를 했으니까 한암이 행리를 쫓지마라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또 법을 간택할 안목을 갖추면 경허의 행리가 이해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경허의 행리는 불이를 체득한 경지에서 나온 것이라 범부는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까지 한암스님 하셨습니다. 골백번 읽어봐도 한암스님은 경허의 행리가 잘못됐다는 비판적 견지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암스님의 말의 맥락을 다 생략하고 윤창화는 한암이 경허를 비판했다는 식으로 왜곡했습니다. 이렇게 사실을 왜곡하고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말하는 자가, 감히 학술을 이야기 하고 학문의 자유를 논할 수 있습니까.

학문,학술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폭력이자 만행이죠. 제 3자인 관전자 입장에선 폐간이 아쉬운 측면이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피해자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피해자인 만해사상선양회는 또다른 피해자인 경허문도들이나 경허를 존경하는 후학인들에게 어떤 형식으로든 사과를 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이미 경허는 손쓸새도 없이 일간지에 잡승으로 기사가 다 나갔습니다. 많은 승려과 불자들이 분노하고 있는 상황에서 윤창화가 뭐 별도의 사과라도 했습니까. 또 피해 당사자들이 윤창화에게 책임을 물었습니까. 책임을 물으면 지금보다 더 펄쩍뛰면서 학문의 자유를 탄압한다고 난리를 치겠지요. 가해 당사자는 사과할 마음도 없고, 가해 당사자에게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구조에서 불교평론 발행 주체가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윤창화가 자발적으로 사퇴한다고 말해도 세상 어느 누가 그걸 곧이 곧대로 믿겠습니까. 뒤에서 승려들이 윤창화 등을 떠밀어 내쫓았을 거라 생각하겠지요. 평론 발행주체가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폐간 말고는 없었던 것입니다.

불교평론 발행주체는 "윤창화에게 폐간으로 화풀이를 하는게 아닙니다". 좌우당간 불교평론이 경허스님과 경허문도와 경허를 통해 이뤄진 근대불교를 욕보였던 책임을 지려고 폐간하는 것입니다. 윤창화의 글이 불교평론에 실리게 한 책임을 지려 하는 것입니다. 불교평론의 발행인들이 보기에도 윤창화의 글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발행인들 떳떳하고 당당했다면 경허문도들에게 사과하지도 않았겠죠. 발행주체가 폐간으로 사죄할 정도로 사안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별것 아닌 일로 폐간한다고 생각하지만 안에선 폐간할 정도의 사안이란 얘기죠.
불자 2012-09-27 15:5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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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화씨의 논문을 보면 경허의 깨달음을 부정한 사실이 없습니다. 어디에 그런 글이 있지요?
그리고 파계란 것도 문둥병 환자와의 일을 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계를 들어 말했고 문제는 보림공부에 파계가 괜찮은가 하는 문제제기입니다.

게다가 잡승이라고 평한 글은 없었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잡된 무리들이 몰라서 하는 소리니 무시해도 됩니다.
경허당의 깨달음과 제자 손제자들의 일에 대한 글을 보니 제 글을 잘 읽지도 않고 글을 쓰시는 듯하군요.

윤창화씨는 수덕문중과 관계자들을 찾아가 해명하고 사과했다고 관계자라는 사람이 적은 댓글에서 보았습니다.
저는 윤창화씨나 발행주체나 수덕문중의 문제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고 한국불교가 해결할 문제라고 했습니다.

윤창화씨의 글을 보면 님 말씀대로 한암스님의 견해에 주관적 해석을 한 것으로 보이고 후회해서 은둔한 것처럼 쓴 것도 비판의 소지가 있는 글입니다.
그러면 그 근거가 부족하고 그에 입각해 쓴 글의 주관적 견해를 비판할 일이지 물리력으로 폐간하면 되겠습니까?
세상에서도 덕으로 다스림은 상책이고 이성으로 다스림은 중책이고 힘으로 다스림은 하책입니다.
 
바꿔야지요.
학술이 아니라하니 백번 양보하여 그렇다 하여도 그 글은 최소한 이성적 논리를 갖고 쓴 글이 아닙니까?
그런 글에 잘못이 있다면 힘으로 바로 잡아야 할까요? 이성으로 바로 잡아야 할까요?         

저는 우리 불교계가 그것도 근대 선종의 종가인 수덕문중이 덕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게 경허만공같은 위대한 선사를 가졌던 덕숭문중의 저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안되는 지 모르겠군요.
되어도 벌서 될 일이 이렇게 늦어짐에 이 일이 낭패를 보게될까 저어되는 것입니다.
불교평론 폐간을 수덕문중이 다시 열게 하다란 내용의 기사가 나오면 님 말대로 이 문제는 경허당의 법화가 어떠했는지 그 저력을 보이게 되는 것인데 말이죠.
말로만 법화니 덕화니 하고 실천이 없으면 그 말은 힘을 잃고 말지요.

전 기다립니다.
그리고 경허스님 100주년을 맞아 경허스님의 아름다운 법화가 세상에 널리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불교평론의 폐간이 그것을 가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경허만공 스님은 호방함을 자랑합니다.
사람을 위해서는 파계도 불사하는 그런 가풍입니다.
덕숭문중이 그것을 배웠다면 합니다.
순임금은 자기 아버지인 상이 죄를 지으면 어찌하겠냐고 했을 때 임금자리를 버리고 어버이를 업고 숨겠다 했습니다.
경허당의 규모나 기개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의를 위해서 작은 절개에 얽매이지 않는 가풍이 어찌 작은 일에 매여 대의를 놓치는 결정을 할 것입니까?
이번 일만 놓고 보면 지금 덕숭문중은 스승을 존중할 줄만 알았지 스승의 뜻을 계승하지는 못하는 듯 합니다.
물론 저의 단견이지만 말입니다.

평론을 폐간함이 사람을 위하는 길일까요?
평론을 유지함이 사람을 위하는 길일까요?

적반하장 2012-09-27 16:5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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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 계율의식 부재.
경허= 선을 일으켰으나 불교를 망쳤다
경허= 주색잡기 업습 끊지 못해 참회
경허= 삼수갑산으로 도피

=== 이게 윤창화의 주장입니다. 그는 글 발표이후 인터뷰에서 경허를 재평가해야 한다, 경허가 한국불교의 모든 병폐의 근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선풍진작시킨 공로는 있지만 그가 깨달은 자인지는 의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재평가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깨달은 자였다면 주색잡기 안했고 계율을 지켰을 것이라는 것이죠. 계율도 어기고 막행막식해서 불교를 망쳤고 그리하여 말년에 자신의 행위가 부끄럽고 창피해서 숨어버렸다. 현실도피했다고 윤창화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승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입전수수-깨달은 자의 마지막 수행단계-가 아니라 부끄럽고 창피해서 한마디로 쪽팔려서 자신을 삼수갑산에 숨겼다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세요. 윤창화가 경허의 깨달음을 전면부정하고 있는데 그런 사실이 어디있냐고 한다면 할말이 없죠. 하도 주색잡기라고 떠들어서 색에 가장 근접한 경허의 행위를 찾으니 문둥병여인 일화가 나온 것입니다. 그거외에 경허가 '색'을 탐한 대표적 사례라는게 별로 없어요. 주색잡기의 '색'은 누가 뭐라해도 남녀성관계를 내포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윤창화처럼 두루뭉술하게 말해서는 안되고 구체적인 경허의 파계행위 사례(역사적 실증)를 적시하고 '색'에 집착했다 라고 평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국불교의 모든 병폐의 근원으로 경허를 지목했는데 경허이전의 진묵,원효, 경허 이후의 만해,춘성,중광은 왜 얘기 안하나요. 경허 이전의 스님들 파계가 현대 승려들에게 미친 영향은 전무한가요. 경허이후의 깨달은 스님들이 파계하면서 무조건적으로 경허탓을 했나요? 전혀 아니에요. 경허이후 깨달은 스님들은 경허를 모방한게 아니라 자기의 깨침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윤창화는 경허이전 깨친스님들의 파계가 현재스님들의 범계행위와 관련이 없다는 점을 노거해야 하고, 경허이후 깨친스님들의 파계는 경허를 모방한 것이라고 논거해야만....최종적으로 한국불교(현재)의 병폐의 원흉이 경허라는 말이 타당성을 갖죠. 그의 논문 어디에 이 두가지 논거가 있었나요? 없어요.

불교평론은 발행주체가 학자들에게 글을 의뢰하여 발행하는 것입니다.님은 위에서

(.....저는 윤창화씨나 발행주체나 수덕문중의 문제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고 한국불교가 해결할 문제라고 했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불교"는 실체가 있습니까? 누가 주체입니까? 모호한 관념이지요.

불교평론 발행인, 불교평론 직원, 불교평론에 글을 기고하는 자, 불교평론에 의해 명예훼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경허문도들....다 주체가 있고 이번 사태와 직접적 관련이 있죠. 폐간이나 아니냐 하는 문제 역시도 이들 직접적 당사자들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그런데 발행주체나 수덕사 문중이 문제가 아니고 한국불교가 해결할 문제라구요?

수덕사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서 아래 이어진 글에선 덕숭문중이 경허만공 스님들의 호방함을 배우라고 야단치십니다. 님도 덕숭문중이 문제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덕숭문중이 스승의 뜻을 계승하지 못한다, 경허당의 기개를 모른다, 대의를 위해 작은 절개에 얽매인다...폐간문제를 덕숭문중의 쪼잔함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덕숭문중의 문제가 아니고 한국불교가 해결해야할 일이라구요?

벌어진 사건은 사건의 주체들이 있는 것이고 그 주체들이 해결하는 것입니다. "한국불교"라는 말에 어떤 주체가 있나요. 차라리 조계종단이 나서서 해결해라 라고 한다면 이해라도 되죠.

지금 현재의 불교평론이 폐간된다해도 다른 평론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만들면 되는 거에요.  굳이 [만해사상선양회가 발행하는 불교평론]이 유지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만해사상선양회가 다시 다른 이름의 평론지를 창간할 수도 있는 것이구요.학자들이 인터넷 블로그 형식으로 온라인 평론지 만들어도 됩니다. 스님들한테 돈 한푼 빌리지 않아도 온라인 평론지 만들면 스님들 눈치 안보고 하고싶은 말 다 할 수 있습니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사상의 자유 만끽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세상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자유가 박탈된 것도 아니고, 글쓸 수 있는 방법,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방법, 더 적은 비용으로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법들이 무궁무진한데 스님들한테 비굴할 필요가 있나요.

윤창화씨는 폐간소식 이후 언론인터뷰에서 강경조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었났다"며 황당해 했습니다. 자신의 발언을 수용못하는 스님들을 이해할 수 없다 했습니다. 그런데 (님의 글에 의하면) 왜 사과했데요.  진실한 사과였다면....논문발표처럼 공개적으로 사과했을 것 같은데.
불자 2012-09-28 00: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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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화씨가 정말 경허당이 한국불교 모든 병폐의 근원이다. 라고 했다면, 이는 상식적이지도 않은 지극히 악의적인 말로 학자로써의 자격조차 없다해도 가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논거나 타당성을 말하라 할 것도 없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잘못된 말이지요.   
 
그러나 선풍진작시킨 공로자인데 깨달은 자인지 의심스럽다... 이하는 그의 논문에 비춰볼 때 님의 확대해석같이 보입니다.

한국불교의 주체는 한국의 모든 사부대중입니다.
모든 사부대중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윤창화씨나 발행주체나 수덕문중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 것은 윤창화씨로 인해 제기된 이 문제가  윤창화씨나 수덕문중 발행주체의 문제에 국한 됨이 아니고 사실은 이미 말했듯이 한국불교의 문제이자 불교 자체의 핵심문제라는 것이고 그래서 한국의 사부대중이 해결할 주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확장되고 논의되어 한국불교에 정견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님도 그중 한 사람으로 자기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니 나아가 세계불교인의 문제고 나아가 인류의 문제이며 나아가 삼계중생의 문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적으로 중생 모두가 갖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기회란 정견을 갖출 기회라는 것이고, 윤 발 수는 다만 그것을 촉발시킨 하나의 불씨라고 할까 그 불씨를 이번 기회에 살려 학술적으로라도 대토론을 해보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말입니다.
이게 사람을 위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 사람을 위하는 게 될 것입니까?

윤창화씨 발행자들 수덕문중만의 문제로 그들이 해결할 문제로만 좁게 볼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의 시단이 이들에게 있으니 여기서 잘 풀어가서 정견을 갖추게 되는 기회를 삼자는 것이지요,
그래서 평론지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누차 말했던 것입니다.
이 문제를 다만 평론지의 문제나 운영의 문제나 각주체들간의 시비의 문제로 서로 다툴 게 아니라 불교인 모두의 공론의 장으로 펼쳐보자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이 시점에서 그 핵심역할은 수덕문중이 쥐고 있고 그 역할을 경허만공당의 가풍이라면 그렇게 펼쳐내 모두를 위한 모두가 관심갖고 동참할 수 있는 정견의 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재를 잘 쓰면 선재가 됩니다.
위기를 잘 넘기면 호기가 되는 것입니다.
호방한 지혜가 필요한 때인데 그게 참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윤창화씨가 정말 그런 인터뷰를 했다면 그의 무지를 일깨우기 위해서도 수덕문중은 한번 논쟁에 불을 붙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제이 제삼의 윤창화씨가 그런 망발을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불교는 1800년 내려오면서 그 저력이 축적되어 있는 종교입니다.
그것을 꺼내 쓰기만 하면 엄청난 역량을 발휘할 것입니다.

간화선이란 전세계에 지금 한국만이 유일하고 이것은 불심종으로 붓다의 새벽별 보고 깨달은 그것입니다.
경허의 공은 바로 그것을 재흥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공인 것입니다.
 저 개인으로는 경허 스님의 공은 그의 과가 있다해도 그것을 덮고도 한참 덮는다고 생각합니다.
윤창화씨가 했다는 모든 병폐라는 말은 무지의 소산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무지하다 바보같다 악의적이다 하고만 있다면 무지한 중생을 나무라고만 있는 격이니, 되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음을 밝게 아시는 분들이 일깨워 줘야지요.
이런 개인의 교화뿐 아니라 한국불교의 정견 등 모두가 이 토론의 장이 열려야 해결될 문제라고 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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