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종기자
urubella@naver.com 2012-06-10 (일) 13:46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과서가 일부 진화론을 삭제한 사실을 보도한 미국 뉴스사이트 기사에 대해 미국 네티즌들의 조롱의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사이트 ‘레딧 세계뉴스’에 6월 5일 “한국이 창조론자 요구에 굴복했다. 출판사들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진화 증거를 없애기 시작했다”는 기사가 올라왔고, 무려 1800여개의 댓글이 달리며 인기뉴스에 올랐다.
댓글 가운데에는 ‘선풍기를 틀고 밀폐된 방에서 자면 죽는다’는 한국의 이른바 ‘선풍기 괴담’을 본뜨면서 “공룡들은 선풍기 때문에 죽었다(The sinosaurs were killed off by fan death.)”는 내용이 올라왔고 “한국인들은 교과서에 퇴화를 넣어야 해, 방금 일어난 일이거든”이라며 진화론 삭제를 조롱했다.
“공룡은 선풍기 때문에 죽었다”는 레딧(Reddit)의 세계뉴스 부문에 9일부터 와글와글하는 댓글 가운데 하나. 위키피이다에도 친절하게 설명이 있는 한국의 ‘선풍기 괴담’을 풍자한 것이다. ‘한국에 넓게 퍼진 믿음으로, 밀폐된 방에서 밤새 선풍기를 틀어두고 자면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다’는 것이 선풍기 괴담인데, 이 댓글은 한국이 ‘선풍기 괴담’과 같은 창조론자들의 진화론 공세에 무너지고 있다고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이것이 북한이 최고인 이유”라거나 “우리가 덜 멍청해 보이도록 해줘서 한국인들에 고맙다”는 댓글도 나타났다. 이 같은 한국 조롱 댓글 러시에 한 한국인은 “한국인으로 부끄러운 뉴스”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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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처>지에 보도된 기사의 공룡 관련 사진 캡쳐.
레딧에 이런 댓글이 쏟아지게 만든 원문은 유명 과학저널 <네이처>가 제공했다. <네이처>는 5일(영국 현지시간) 온라인 속보판에서 ‘한국이 창조론자의 요구에 항복하다- 출판사들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진화의 표본을 없애기 시작’(South Korea surrenders to creationist demands-Publishers set to remove examples of evolution from high-school textbooks)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
한국에서 창조론을 주장하는 ‘교과서 진화론 개정추진회’(이하 교진추)가 교육과학기술부에 시조새와 말 등 찰스 다윈의 진화론의 근거로서 교과서에 실려 있는 표본의 삭제를 청원했고, 일부 출반사들이 지난해 12월과 올해 3월 각각 해당 내용을 과학 교과서에서 빼기로 했다는 게 기사의 골자다. 한국정부(교육과학기술부)가 지난 3월 교과부에 제출한 ‘말의 진화 계열은 상상의 산물’이라는 교진추의 청원을 받아들인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 같은 미국의 반응은 지난달 중순 국내 언론에 보도됐을 때에 견주어볼 때 과학 교과서에서 진화론의 핵심 콘텐츠가 삭제된 것에 대해 국내보다 미국인들과 세계의 과학계가 더 걱정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론을 표방하는 창조론은 과학의 거죽을 빌린 기독교의 신앙에 가깝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또한 진화론을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 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쳐야 한다는 논란이 이는 곳은 미국 말고는 한국이 유일하다는 게 정설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진화의 법칙’이라고 할 정도로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 이번에 기독교 단체인 교진추의 청원으로 과학교과서에서 진화론의 증거들이 삭제되게 된 것이다. 교진추는 2009년 설립된 기독교 단체로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진화론’을 가르치는 교육제도와 교과서의 개정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들은 신앙이 교육과 과학에 우선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사태와 관련 장대익 서울대 교수(자유전공학부, 생물학)는 “진화생물학의 성과를 반영하지 못한 채 옛날 일본 과학 교과서 베끼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가 이번에 교진추에 빌미를 줬을 뿐”이라며 “진화론의 패배가 아니라 우리의 생물학계와 출판계가 게으르고 안일했던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한국의 지성들은 이번 진화론 사태와 관련해 “종교집단이 과학과 교육에까지 행세를 하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이제는 교진추에 빌미를 준 진화학계가 반성할 차례이며, 제발 공부 좀 하자”는 반성의 여론이 모아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