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암 오르는 길에 질경이가 가득한 까닭은?

부처님오신날, 어느 곳으로 갈까? 불교 전문기자로 일하면서 해마다 갖는 고민거리였지만 올해는 달랐다. 일찌감치 올 봉축법회는 전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이 주석하는 월악산 보광암으로 갈 것을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봉은사에서 나와 마땅히 머물 절이 없어 총무원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월악산의 한 암자로 떠난 명진 스님을 이제까지 한 번도 절로 찾아뵌 적이 없었기에 이날의 보광암 행은 일종의 빚을 갚는 의미도 있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달려간 월악산은 생각보다 멀었다. 굽이굽이 충주호와 월악산 자락을 돌고 돌아 도착한 보광암은 말 그대로 전형적인 암자였다. 흥미로운 것은 초입 신륵사에서부터 보광암에 이르는 비포장 산길에 질경이가 산재해 있는 것이었다. 질경이라! 밟히고 밟혀도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는 식물이 아닌가. 어쩌면 질경이는 종교권력과 국가권력이라는 두 개의 무시무시한 권력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며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는 명진 스님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이 대표. 이곳에 정말로 처음 왔단 말인가?” 말씀은 서운하다는 표현이었지만 명진 스님의 표정만큼은 환하게 밝았다. 그저 보광암에만 오면 암자의 이름처럼 스님의 안광이 널리 퍼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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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산 보광암에서 봉행된 부처님오신날 봉축법회에서 불자들에게 참회의 3배를 올리고 있는 명진스님. 사진=단지불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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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스님의 참회3배와 참회발언에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불자들의 모습.

오늘은 부처님오신날이 아니라 ‘부처님 우신 날’

이윽고 봉축법회가 시작됐다. 명진 스님은 법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최근 불교계를 뒤흔든 이른바 승려도박 및 잇따른 폭로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오늘은 ‘부처님오신날’이 아니라 ‘부처님 우신 날’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그만 세간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는 무리가 되었으니, 어찌 부처님께서 이 모습을 보고 우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잠시 전 환한 미소를 지었던 명진 스님의 표정은 어느새 무거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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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암에서 봉행된 부처님오신날 봉축법회 장면. 서울 등 각지에서 약 400여 명의 사부대중이 동참해 성황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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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암에 걸린 고 노무현대통령 영부인 권양숙 여사의 등.

“잘 아시겠지만 그 부끄러운 일에 제 이름도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비록 오래 전의 일이고 봉은사 주지로 있을 때에도 여러 분께 참회를 했었지만, 허물을 덮을 길이 없습니다. 다시금 깊이 참회합니다.”

명진 스님은 갑자기 법문을 위해 걸쳐 앉았던 툇마루에서 일어나 신도들을 향해 참회의 3배를 올렸다. 흘러내리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렁그렁 물기가 맺혀 있었다.

갑작스럽게 명진 스님의 절을 받은 신도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엉거주춤 일어나 맞절을 하는 이도 있었고, 이내 눈물을 흘리며 저희는 괜찮다, 이미 지난 일이며 우리는 스님을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신뢰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법석에 참여했던 정동영 의원 부부도 엉거주춤 일어나 스님에게 맞절을 했다.

페이스북 고등학생 친구의 ‘존경 접겠다’ 글 읽을 때 피눈물

절을 마친 스님은 이어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다면서 페이스북에서 친구로 있는 미국의 한 고등학생 이야기를 전했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며 명진 스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접겠다’는 그 학생의 글을 읽으며 심장을 후벼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고 명진 스님은 토로했다. 이 학생 뿐 만이 아니라 여기 계신 분들을 포함하여 모든 불자들이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그간의 고뇌와 번민을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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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암의 암자 툇마루를 법좌로 삼아 설법을 하고 있는 명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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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암 암자 마당에 만개한 불두화의 모습. 우아하고 아름답다.


스님은 앞으로 한국불교가 참 큰일이라며, 우려했다. 이번 사태의 파장이 1960년 정화라는 이름으로 비구대처가 싸움을 벌였던 것, 1980년 신흥사 승려살인사건, 그리고 지난 1994년과 1998년 종단사태 때 입었던 피해를 다 합친 것보다도 더 파장이 큰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명진 스님은 이어 “지금까지 안하무인의 태도로 조금은 거칠게 살았던 태도를 바꿔야겠다, 겸손해져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잘 안된다고 술회했다. 하긴 60년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잘 바뀌겠느냐며 이해를 구하기도 했다.

남녀노소 불자들 400여 명 보광암 마당법석 가득 메워

페이스북에서 펼친 활발한 활약 덕분인지 이날 법회에는 남녀노소, 특히 젊은 불자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다. 여기에다 봉은사에서 명진 스님과 함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스님 뒤에서 천일기도를 했다는 노보살님, 60평생 살면서 수많은 스님들 봤지만 명진 스님처럼 순수한 분은 못 봤다는 보살님, 가족들과 함께 한 여행 중 우연히 지하철도서 파는 곳에서 <스님은 사춘기>를 읽고 감명을 받아 명진 스님을 직접 뵙고 싶어 홀로 왔다는 대학생까지 이날 봉축법회에 참석한 불자들의 사연은 매우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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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 스님 특유의 해학과 풍자, 절묘한 비유가 어우러진 법문은 늘 좌중을 때론 폭소로, 때론 태산같은 진지함으로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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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축법회를 마치고 어둠이 막 드리울 무렵 연등에 점등을 하고 있는 명진 스님.


단지불회 회원 가운데에는 최근 일로 가장 아파하실 분이 명진 스님이라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드리겠다는 뜻으로 대절 버스에 몸을 실은 불자들도 적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이들은 신륵사 주차장까지 마중을 나온 명진 스님의 모습을 보고는 새벽부터 서둘러 온 피곤함을 말끔히 씻어냈다.

아이들에서부터 노보살님에 이르기까지 명진 스님은 얼싸안기를 거듭했다. 스님과 신도들이 서로 안고 힘이 되어주는 아름다운 광경이 부처님오신날 아침 보광암 아래 신륵사 주차장에서 그렇게 연출되고 있었다. 이제 이 법회가 끝나면 3개월 간 봉암사로 하안거에 들어갈 명진 스님이라는 생각에 불자들의 마음은 더욱 뜨거운 듯 보였다. 이들은 그 뜨거운 마음을 깊고 오랜 포옹으로 표현해내고 있었다.

다시 법회장. 불자들은 참으로 오랜 만에 듣는 명진 스님의 헌공의식과 축원을 눈을 감고 정성을 다해 경청했다. 아마도 봉은사 시절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명진 스님은 법회를 이어갔다.

석달 후 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되어 돌아오겠다

“사실 이미 지난 겨울부터 봉암사에서 하안거를 보내시기 위해 방부를 들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터졌어요. 마치 예정이나 한 것처럼 그렇게 되었지요. 아무튼 이번에 봉암사에 들어가서는 죽었다 생각하고 들어가셔서 용맹정진하과 더욱 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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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를 위해 새벽같이 월악산으로 달려온 불자들이 명진스님과 함께 보광암으로 오르고 있다.

나는 본래 다이아몬드 같은 사람이라며 다이아몬드는 구정물에 빠져도 깨끗이 닦아내면 다이아몬드이니, 이번 안거를 통해 반짝반짝하게 닦고 나오겠다고 밝힌 명진 스님은 “이런 저를 만난 여러분이나 여러분을 만난 저나 모두 행복한 사람”이라고 특유의 ‘깔대기’를 들이댔다. 명진 스님은 다른 사람을 좀처럼 칭찬하는 일이 없는 도올 김용옥 선생도 최고 권력자를 향해 스님처럼 혹독하게 직설로 비판을 한 스님은 한국불교 역사상 한 사람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극찬을 했다며, 나 같은 스님을 만난 여러분들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냐며 폭소를 유도했다.

쥐락펴락 대중을 울리고 웃기는 자유자재한 변재를 이날 봉축법회에서도 명진 스님은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

명진 스님은 법문 중간 중간에 이번 종단의 위기 사태에 대한 견해를 슬쩍슬쩍 밝히기도 했다.

죄는 감추는 게 문제, 드러내야 해결의 길 열린다

“죽어서 염라대왕에 가면 업경대라는 것이 있어서 살아 있을 때 지은 죄를 낱낱이 비추어 심판을 받는다고 하는데, 요즈음엔 인터넷이 바로 업경대”라고 밝힌 스님은 “죄는 감추는 것이 문제이지 잘못을 드러내면 해결의 길이 열린다. 또 감출 수도 없다”고 강조했다.

“늘 거짓말이 모든 죄의 근원이 된다. 거짓말들이 쌓여 마치 재앙처럼 이번 사태가 터졌고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라는 명진 스님의 발언은 여러 가지 의혹을 사고 있는 현 총무원장을 향한 질책이자 조언으로 들렸다. 한마디로 여러 가지 제기되고 있는 의혹들에 대해 당당하게 사실을 밝히고 거기에 합당한 행보를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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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암으로 오르는 길 바닥에는 질경이들이 즐비하게 자라 있다.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명진스님의 상징처럼 보였다.

“저는 단지불회 회원들이 자랑스럽다. 여러분들은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바닥을 찾으려는 분들이 아닌가. 알다시피 불교는 비움으로써 해탈하는 종교이다. 기도처도 많고 법문 재밌게 하는 스님들도 많은데 이곳까지 찾아와 나의 법문을 듣는 것은 근본을 해결하려는 불자이기 때문이다.”

‘마치 급물살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려는 노력과 같은 것’이라는 절묘한 비유로 수행의 참뜻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명진 스님은 늘 꾸준하게 노력하고 부딪치는 노력이 있어야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수행의 이치를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날 보광암 봉축법회에는 단지불회 회원불자들, 명진스님펜클럽회원들, 정동영 의원 내외를 비롯해 배길현 목사, 정인수 덕산면 장학위원, 누리꿈터 박미숙 선생님, 김홍민 박사, 민성진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 등이 함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