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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지난연재 김정빈 시인의 감꽃마을
물방울의 말
내가 아래로 아래로만 내려가는 데는 까닭이 없는 것도 아니랍니다. 아뭏든 세상에서 가장 드넓은 것은 저 낮은 거기에 있다는 것을 나는 아니까요! 우리들이 서로 앞서려고 다투지 않는 데는 까닭이 없는 것도 아니랍니다. 아뭏든 흐르고 흐르다 보면 언젠가는 저 영원한 품안에 이르리라는 것…
동쪽으로만
자꾸자꾸만 나아갔네 동쪽으로 동쪽으로만 길은 없고 가시나무숲 그래도 안쪽으로만 나아갔네 나아갔네 용감하게 나 혼자서 해가 지고 밤이 새고 그래도 또 나아갔네 해뜨는 능금빛 나라 동쪽으로 동쪽으로만 * 이 시집에 해설을 써준 장석주 시인이 지적하듯이 이 시는 교훈적인…
고 향
감꽃 마을 지나서 은빛 시냇물 징검다리 건너서 찔레꽃 언덕, 언덕 너머 활짝 열린 푸른 과수원, 과수원 사잇길은 탱자 울타리, 외딴집 외딴집 외딴집 한 채. 탱자꽃 탱자꽃 탱자꽃 피어, 아이는 일곱 살 동무도 없이, 익어가는 저녁놀 바라고 섰네. * 한 연이 …
눈 쌓인 날
어제는 온종일 눈이 내리고 오늘은 흙담장 밑에 아른한 햇살 눈 쌓인 날 햇빛은 눈에 부시어 밀감 빛깔로 흙담장 밑에 겹겹이 쌓여…. 어제 온 전갈이라곤 하늘 눈 소식 오늘은 강나루에 한 무리 철새 눈 쌓인 날 새소리는 귀에 뜨이어 빠알간 동백꽃 그늘…
이 유
안델센 동화에 나오는 나쁜 거울조각이 눈에 들어가 어제 엄만 앓으셨지만 밤새 씻은 듯 나으신 까닭을 아셔요? 그건 무서운 거인이 보따리를 싸들고 가버렸기 떄문, 먼지 같은 작은 거울조각으로 아픔 주는 거인이. 머리맡엔 화분이 하나 아기 봉숭아. 토옥 톡! 폭탄 터지는 씨주머니 때문…
숫자들의 외출
엄마, 어젯밤 달력 속에서 서른한 개의 숫자들이 푸르스름한 옷을 입고 톡! 톡! 톡! 뛰어내려 뒤뚱거리며 남싹남싹 창문을 넘어갔다간 몰래몰래 돌아오는 걸 난 보았답니다. * 안데르센과 그림 형제의 동화에 매혹되어 지낸 시절이 있었다. 한밤중, 모두가 잠든 때를 보아 살그머니 달력…
메아리는 왜 맑은가
동구밖 포플라숲에 여름이 오면 은빛 풀루우트를 든 처녀 여신들이 물가로 나와요. 반짝반짝 나뭇잎들은 아가 웃음처럼 빛나고 처녀 요정들은 서늘한 골짜기를 들락거리며 한 철 내내 메아리들을 맑혀 놓는답니다. * 어떤 수필가가 이 시의 제목을 보고 “제목 자체가 하…
아가의 공로
해님은 세상을 비치다 비치다 지치면 아가 눈빛을 보고 힘을 낸다나? 꽃들은 향기를 자아내다 자아내다 지치면 아가 살내음을 맡고는 힘을 낸다나? * “태양이 없다면 인간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과학자의 말이다. “아기가 없다면 태양도 지칠 것…
악기들이 사는 곳
피아노는 겨울 아침에 바이올린은 가을 오후에 풀루우트는 여름 숲속에 하아프는 봄 호수에 * 문학의 절반 이상은 비유이다. 비유를 통해 작가는 사물에게 새옷을 입히고, 그렇게 단장된 새로워진 사물을 감상함으로써 독자의 마음은 풍요로워지는 법. 그리하여 나 또한 네 계절을 악기들에 비유…
휘파람새
사랑할 때만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휘파람새 꼬롱꼬롱 꼬낏꼬낏 그 노랠 듣느라고 숲속은 조―용 새들도 짐승들도 나무들까지 모습은 수수하지만 휘파람새 몸은 작지만 휘파람새 * 우리나라의 3대 명조(鳴鳥)로 불리는 휘파람새는 짝을 부를 때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한다.…
밤송이는
가시방패로 자신을 지키다가 익으면 가슴을 연다, 밤송이는 *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 익으면 가슴을 연다. 익으면 마음을 낸다. 곡식도, 밤송이도, 그리고 사람도.
손 님
아무도 모르라고 풀더미 속에 숨어도 새둥우리를 찾아내는 친구가 있다 너울너울 넘어오는 칡넝쿨 산새들에겐 손님이라곤 모두 질색이지만 그래도 이 손님만은 무심히 맞고 ―아무 일 없나요? 오늘은 자주색 칡꽃이 피었다 * 산새의 친구가 산새만은 아니다. 너울너울 넘어들어 안…
혼자 본 비밀
냇가 바위 틈에서 하얀 물새알 다섯 개가 있는 둥지를 보았어요! 가슴이 막 뛰어요! 떡갈나무 숲속에서 맑은 물 퐁퐁 샘솟는 옹달샘을 보았어요! 세상이 참 맑아요! * 시는 경탄, 즉 놀라움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니, 시뿐아니라 모든 예술이 놀라움, 특히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을 때…
옹달샘
누가 맨처음 불렀을까 옹달샘 옹알이하는 아가가? 옹달샘 젊은 엄마랑 첫아가는 옹달샘 보는 것마다 신기해서 옹달샘 옹알옹알 옹알이로 옹달샘 둘이 같이 이름지어 옹달샘 * 말에 앞서 소리가 있다. 그 소리가 의미를 담게 되어 말이 성립되…
아빤 어렸을 때
아빤 어렸을 때 감꽃을 주워 먹었단다. 왜요? (얼굴이 빨개지며) 너무 심심했거든! 심심한데 왜 감꽃을 먹어요? (위엄을 차리며) 배가 고파서 그런 건 아니야! 심심할 땐 만화책, 배고플 땐 피자 파이여요! (화가 나서) 피자 파이보다 감꽃이 더 맛있어! 근데 지금은 왜 감꽃을 안 잡수셔요? (깜짝 놀라더니, 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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